정의
732년 9월 발해군이 당나라 등주(登州: 지금의 중국 산동성 봉래시)를 급습한 사건.
역사적 배경
728년 당 현종은 흑수말갈의 추장에게 이헌성(李獻誠)이라는 중국식 성명을 하사했고, 흑수경략사(黑水經略使)를 제수하였다. 같은 해 4월 당에서 숙위 중이던 발해 왕자 대도리행(大都利行)이 사망했다. 흑수말갈에 대한 당의 조치는 발해를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또한 발해의 차기 왕위계승자 대도리행이 갑자기 사망한 사건은 대무예의 의구심을 불러일으켰다. 대문예는 형의 장자 대도리행의 사망으로 차자인 대흠무(大欽茂)와 똑같이 왕위계승권을 주장할 수 있는 입장이 되었다. 그래서 발해의 차기 왕위계승에 당의 개입 가능성이 커졌다.
발해국왕에게 있어서 망명한 동생 대문예의 문제는 물러설 수 없는 입장이 되었다. 730년 정월에 입당한 발해사신 대낭아는 당 현종이 대문예를 영남(양자강 이남 지역)으로 유배보냈다는 것은 거짓이라는 사실을 본국에 보고했다. 대무예는 강력하게 당에 항의했고, 정보누설을 알아챈 당 조정은 책임자를 파면하는 동시에 발해에 사신을 파견했다.
731년 8∼9월경 칙서를 지참한 당의 사신이 발해를 향해 출발했다. 칙서의 내용에서 당 현종은 발해국왕 대무예의 행실에 흠이 가는 것을 막기 위해 동생 대문예를 보호했다고 했다. 이어 발해가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음을 믿고 대문예의 처벌을 요구하는 것은 당을 배반하는 행위이며, 이에 대해서 당이 조치를 취할 것임을 시사했다. 이러한 칙서 내용에 대한 강경한 대답으로 발해는 732년 9월 당의 등주를 기습 공격하게 되었다.
경과
당 현종은 발해군의 급습으로 등주자사 위준이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자 우령군장군(右領軍將軍) 갈복순(葛福順)에게 반격을 명했다. 하지만 여기에 관한 전투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갈복순이 병력을 이끌고 등주 현장에 도착했을 무렵 발해군은 철수해버린 듯하다. 장문휴가 이끄는 발해군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후 전선을 타고 귀환한 것으로 여겨진다.
결과
의의와 평가
참고문헌
- 『발해의 지배세력연구』(임상선, 신서원, 1999)
- 『발해정치사연구』(송기호, 일조각, 1995)
- 『발해의 대외관계사』(한규철, 신서원, 1994)
- 「발해와 당의 사신 파견을 통해 본 대문예 망명사건의 추이」(김종복,『역사와 경계』76, 2010)
- 『舊唐書』
- 『新唐書』
- 『資治通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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