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이 신하에게 일정한 제목을 주어 시를 짓게 하는 것이 통례이다. 그 형식은 일정하지 않다. 아무 제목이나 내용을 지시하지 않고 작자에게 일임하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시를 짓는 데에 있어서 다른 한시와 구별지을 수 있는 형태상의 특징이 없다. 그 제재나 내용도 제한은 없다.
응제시는 왕이 측근의 사신(詞臣)들에게 응제를 명하므로, 자신의 문재를 왕에게 인정받을 좋은 기회가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작품에 대한 평가가 어떤가에 따라 개인의 영욕을 갈라놓는 경우도 발생하였다. 권근(權近)의 <응제시>는 중국 황제에게 불려가 문책을 모면하고 오히려 칭찬을 받아 자신의 문재를 과시함은 물론 외교적 마찰을 원만하게 해결하였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되었다.
조선시대의 많은 문인들이 응제시를 남기고 있다. 성석린(成石璘)·최항(崔恒)·양성지(梁誠之)·이직(李稷) 등과 같이 조선 초기에서부터 김안국(金安國)·신흠(申欽)·이정구(李廷龜) 등에 이르는 많은 사람들이 응제시를 남기고 있다. 김흔(金訢)은 <응제십수 應製十首>를 남기고 있다. 고경명(高敬命)은 <응제어병62영 應製御屛六十二詠>을 남겨 주목받고 있다.
응제시는 고려시대에 보인다. 그러나 더 왕권이 확립된 조선 초기부터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세종·성종·정조 등의 문한(文翰:문필에 관한 일)에 힘을 기울이던 우문지주(右文之主)의 경우는 이와 같은 응제시를 통한 신하들과의 문학적 교환이 많은 것을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