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학의 진흥을 위하여 지방 향교에 대신하여 중앙의 동쪽과 서쪽에 설립되었다. 개경으로 환도한 지 2년째인 1272년에는 그 운영책임자격인 별감을 각 1인씩 임명하였다.
향교 정도의 교육을 실시하였으며, 학당내에 문선왕묘(文宣王廟)를 설치하지 않은 것이 향교와 다른 점이다. 그러나 당시 40여 년에 걸친 몽고와의 항쟁으로 건물이 파손되는 등 학당의 발전이 이루어지지 못하였으며,『고려사』 등의 사료에 나타난 동서학당의 기록은 아주 간략하게 언급되어 있어 자세한 사항은 알기가 힘들다.
130여 년 동안 계속 운영되다가 유교가 점차 진흥됨에 따라 1390년(공양왕 2)경개경의 각 부인 동·서·남·북·중의 5부에 확장, 설치하여 5부학당(五部學堂)이라 하였다. 이는 조선시대에 와서도 그대로 실시되다가 그 뒤 4부학당으로 개칭되었다.
동서학당은 중국에서도 볼 수 없는 고려 후기의 독특한 교육기관으로 국자감에 진학하지 못한 중앙 학생들의 교육을 담당하였으며, 조선시대 학당의 시초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