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 요약
방호별감은 고려 후기 왜(倭)와 몽고군, 그리고 합단(哈丹)이 침략하였을 때 산성 등 요지에 파견된 군대의 지휘관이다. 산성방호별감과 수로방호별감, 해도방호별감으로 편제되었는데 주로 산성에 파견되었다. 방호사, 방어사라고도 불렀다. 특히 대몽전쟁기에 각지의 산성에 파견하여 백성들의 항전을 독려하여 몽골군 격퇴에 기여하였다. 몽골의 제6차 침입 이후에는 방호별감의 대민 수탈과 근무 태만 등으로 성이 함락되거나 주현민들이 방호별감을 죽이거나 몽골군에 넘겨주는 일도 일어났다. 제주와 같이 바다 건너 커다란 군진에 방호별감을 보내 비상한 상황에 대비하는 경우도 있었다.
정의
고려 후기 왜(倭)와 몽고군, 그리고 합단(哈丹)의 침략 때 이를 방어하기 위해 산성 등 요지에 파견된 군대의 지휘관.
개설
내용
전시 임시수도 강도(江都)에서 육지에 대해 야별초(夜別抄)와 더불어 각지 산성에 방호별감을 여러 차례 내보내 백성들의 항전을 독려하였으며 몽고군의 격퇴에 노력을 기울였다. 강도 조정은 적어도 몽고 제5차 침입 때까지 방호별감 파견의 효과를 보았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몽고군에 비해 군사적 열세가 현저해지고 투몽사태(投蒙事態)가 일반화되는 몽고 제6차 침입 때에는 큰 효과를 보지 못하였다. 오히려 방어의 책임을 띤 방호별감의 대민수탈과 근무태만 등으로 성이 함락되는 경우도 있었다.
서해도(西海道) 양산성(椋山城) 방호별감 권세후(權世侯)는 몽고군을 방어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는데, 성 주변 지형의 험준함을 믿고 방비를 전혀 하지 않았다. 이때 몽고군이 성을 공격하여 들어와 인가(人家)를 불태우고 백성들을 생포하여 함락시키자 권세후는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다. 또한 동주산성(東州山城) 방호별감 백돈명(白敦明)은 백성들을 성 안에만 묶어두고 밖의 출입을 금하였다. 그는 적이 다가오기 전에 성 밖에 나가 가을걷이를 하자는 백성들의 의견을 듣지 않아 그들의 원망을 샀다. 이후 몽고군이 쳐들어와 6백 명의 정예군(별초군)으로 항전하였으나 군사들이 싸우기도 전에 모두 도망쳐 성이 함락되었다. 더구나 양근성(陽根城) 방호별감인 윤춘(尹椿)은 몽고군이 성을 포위하자 무리를 거느리고 나와 항복하였으며, 몽고군이 선발한 장정 6백명을 영솔하며 몽고군을 도왔다.
대몽전쟁기(1231∼1259) 가장 큰 피해를 보았던 몽고 제6차 침공 때인 1258년(고종 45) 8월 서해도의 가수굴(嘉殊窟)과 양파혈(陽波穴)이 모두 함락되고 별감(別監)은 전사하거나 포로가 되기도 하였다. 같은 해 9월, 강원도 이천(伊川) 광복산성(廣福山城)과 황해도 곡산(谷山) 달보성(達甫城)에서는 피난 인민들이 방호별감을 잡아 몽고군에 항복하는 경우도 있었다. 대몽전쟁 후반부로 갈수록 강도 지배층의 경제적 수탈에 신음하고 군사적으로도 무방비 상태에 놓여 있던 주현민들이 방호별감을 죽이거나 사로잡아 몽고군에게 넘겨주었으니, 방호별감 분견에 의한 산성입보항전에 일정한 한계가 도래하였다고 할 수 있다.
변천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 『고려후기 군사제도 연구』(권영국, 서울대학교 사학과 박사학위논문, 1994)
- 『대몽항쟁사민족전란사』 제5집(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편, 1988)
- 「대몽전쟁기 최씨정권의 산성입보책과 지방통치」(강재광, 『전쟁과 유물』창간호, 2009)
- 「대몽전쟁기 최씨정권의 해도입보책과 전략해도」(강재광, 『군사』66, 2008)
- 「대몽항쟁·원간섭기 산성해도입보책의 시행과 치소성 위상의 변화」(최종석, 『진단학보』105, 2008)
- 「고려후기 몽고침입과 민중항쟁의 성격」(이익주, 『역사비평』24, 1994)
- 「고려의 별감에 대하여」(김남규, 『경남대학교 논문집』5, 1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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