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공주(公州). 초명은 박문수(朴文秀).
과거에 급제한 뒤 최우(崔瑀)의 가신(家臣)이 되었는데, 기민하고 변론을 잘하여 요직에 올랐다. 정방에 근무할 때는 김창(金敞)·송국첨(宋國瞻) 등과 함께 권세를 부렸다.
일찍이 사관(史館)의 수찬(修撰)이 되어 최우의 공적을 허무맹랑하게 과장하여 만든 책 5, 6권을 펴낸 일이 있었다. 뒤에 형부상서가 되어 최항(崔沆)의 일을 논하다가 흑산도(黑山島)에 유배되었다.
다시 최우가 소환하여 개성(開城)으로 올라오는 도중 최우가 죽자, 최항이 보낸 사람에 의하여 바다에서 죽임을 당하였다. 일찍이 신흥창(新興倉)을 세워 흉년에 대비하게 함으로써 굶주린 백성들이 구제되자, 백성들이 “박공(朴公)이 아니면 우리가 죽었을 것이다.”라고 칭송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