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종(元宗) 때 문과에 급제해 도병마녹사(都兵馬錄事)가 되었다. 1268년(원종 9) 4월에 몽골은 개경 환도(開京還都)가 지연되는 것을 문제 삼아 집정자인 김준(金俊)을 지목하여 소환하려고 하였다. 이에 무신정권(武臣政權) 내부에서는 몽골 사신을 죽이고 더 먼 섬으로 천도하여 몽골과 재대결을 해야 한다는 주장이 일어났다. 이를 기회 삼아 원종을 폐하고 김준을 왕으로 올리는 것까지 거론되는 상황이었다. 이때 엄수안이 김준의 아우인 김충(金冲: 金承俊)에게 이것이 비현실적이라고 설득하여 그 논의를 포기하도록 하였다.
같은 해 12월에 임연(林衍)이 김준을 제거하는 것을 도왔으며, 그 공으로 낭장 겸 어사(郎將兼御史)를 제수 받고, 곧 동경 판관(東京判官)이 되었다. 1270년(원종 11)에 원종이 몽고 군대를 이끌고 귀국해 강도(江都)에 출륙령(出陸令)을 내리자 임연의 아들 임유무(林惟茂)가 각지에 야별초(夜別抄)를 보내 사람들을 산성(山城)과 해도(海島)로 이주시키고 대항하려 하였다. 그러나 그 지역의 지방관이었던 엄수안이 이에 호응하지 않음으로써, 무신정권을 종식시키는 데 일조하였다.
그 뒤 삼별초(三別抄)가 진도(珍島)를 근거지로 해 반란을 일으켰을 때 금주수(金州守)인 이주(李柱)가 도망을 가 버리자, 권지금주사(權知金州事)를 겸임하면서 민심을 진정시켰다. 1271년(원종 12)에 지금의 밀양인 밀성군(密城郡)에서 방보(方甫)를 비롯하여 진도의 삼별초에 호응해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진압하였다.
이후 중랑장(中郎將), 전법총랑(典法摠郎)을 거쳐 남경부유수(南京副留守)가 되었다. 이때 국왕이 지금의 서울 지역인 남경(南京)에 행차하자 후하게 접대해 칭찬을 들었으나, 백성에게 가혹하게 하면서 왕의 총애를 받으려 한다는 비난이 있기도 하였다.
1285년(충렬왕 11)에 남경부사(南京副使)가 되었으며, 이때 국왕의 행차를 맞이해 접대를 풍성하게 했다. 충렬왕(忠烈王)이 이를 유능하다고 여겨 3품의 관계(官階)를 수여하였다. 그 후 판사재시사(判司宰寺事)로 승진했다가 1290년(충렬왕 16)에 충청도지휘사(忠淸道指揮使)가 되었으며, 1292년(충렬왕 18)에는 서경유수(西京留守)로서 서북면지휘사(西北面指揮使)를 겸임하였다. 지방관으로서 부임하는 곳마다 유능하다는 소리를 들었고, 뒤에 부지밀직사사(副知密直司事)로 물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