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보사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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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선(道詵)의 비보사탑설(裨補寺塔說)에 의해 지정되거나 건립된 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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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도선(道詵)의 비보사탑설(裨補寺塔說)에 의해 지정되거나 건립된 사원.
개설

비보사탑설 또는 비보사상이란 나말여초의 격변기에 도선이 불교교단을 재정비하고 나아가 전국토를 재개발하기 위해 수립한 사상체계이다. 이 사상은 불교의 밀교사상(密敎思想)과 도참사상(圖讖思想)이 결합되어 형성된 것이다.

내용

밀교사상은 전국토를 하나의 만다라(曼茶羅) 도량으로 보고, 밀교의 택지법(擇地法)에 따라 사원 · 부도를 세우고, 여러 불 · 보살에게 가호를 빌어 나타난 신력(神力)으로 국가와 국민을 수호하고 세상이 태평하기를 염원하였다. 또한 도참사상은 국가 · 왕실의 흥망성쇠 및 인간의 길흉화복을 예언하였다.

도선에 의하면, 지기(地氣)는 왕성하기도 하고 쇠퇴하기도 하는데, 쇠퇴하는 곳에 자리잡은 인간이나 국가는 쇠망하게 마련이다. 따라서 이를 막기 위해 산천의 역처(逆處)나 배처(背處)에 인위적으로 사탑을 건립해서 지기를 보완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반대로 산천지세에 어긋나게 하거나, 비보를 믿지 않고 사원불탑을 파괴하면 나라가 망하고 인민이 불행하게 된다는 것이다.

비보사탑설은 신라 쇠망의 한 원인을 사원의 무분별한 창건에 따른 지덕(地德) 손실에서 찾는 고려 태조에 의해 신봉되었다. 이로써 이후 고려시대를 통하여 널리 확산되었다. 시기에 따라 도선을 가탁하는 수많은 각종 비기류(祕記類)들이 나타났다. 고려 말의 승려인 굉연(宏演)이 『고려국사도선전(高麗國師道詵傳)』을 저술해 비보사탑설을 체계화하기에 이르렀다.

고려 태조는 「훈요십조(訓要十條)」에서 도선의 비보사탑설에 의해 지정된 곳 이외는 어디에도 사탑을 건립하지 말도록 하였다. 이후 고려는 국가 차원에서 비보사원을 장려하고 보호하는 정책을 시행하였다. 그 중의 하나가 비보사원에 대한 국가토지의 분급이었다. 그 결과 모든 사원의 비보사원화 경향이 나타나서, 『도선밀기(道詵密記)』에 지정된 비보소(裨補所)가 3,800개소에 달했으며, 전국의 유명사찰이 거의 다 망라되고 있다.

의의와 평가

이러한 비보사탑설의 성행과 비보사원의 수적 확대는 말기에 불교계 폐단을 가져왔고, 주자성리학을 수용한 신진사대부들로부터 격렬한 비판을 받게 되었다. 조선시대에도 비보사탑설은 조선불교의 한 사상으로 수용되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억불숭유정책의 엄격한 제약을 받는 것이었다.

참고문헌

『고려사(高麗史)』
『고려국사도선전(高麗國師道詵傳)』
『도선밀기(道詵密記)』
『조선금석총람(朝鮮金石總覽)』 상
「도선국사(道詵國師) 비보사탑설(裨補寺塔說)의 연구(硏究)」(양은용, 『선각국사(先覺國師) 도선(道詵)의 신연구(新硏究)』, 영암군, 1988)
「고려전기(高麗前期) 사원전(寺院田)의 분급(分給)과 경영(經營)」(이병희, 『한국사론(韓國史論)』 18,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1988)
「도선비보사상(道詵裨補思想)의 연원(淵源)」(서윤길, 『불교학보(佛敎學報)』 13, 1976)
「도선(道詵)의 생애(生涯)와 나말여초(羅末麗初)의 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최병헌, 『한국사연구(韓國史硏究)』 11, 1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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