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高宗, 1192~1259, 재위 1213∼1259)은 강종과 원덕태후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나 1213년 왕위에 올랐다. 왕비는 희종의 장녀 안혜왕후(安惠王后)이다. 집권기 내내 정치적으로 최충헌과 그 일가의 무단정치로 실권을 잡지 못하였고, 거란과 몽골의 침입으로 고통받았다.
몽골과 항전을 위해 강화 천도를 단행하고 불력(佛力)으로 몽골을 물리치기 위해 『고려대장경(高麗大藏經)』을 만드는 등 문화적 업적을 남기기도 하였으나, 대신 국토가 초토화되고 많은 인명과 문화유산이 피해를 입었다. 1259년 신하인 유경(柳璥)의 집에서 사망하여 홍릉에 장사 지냈다.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을 비롯한 각종 기록에는 강화부(江華府) 서쪽 5리 혹은 6리, 고려산 동록 혹은 남록 등으로 표기하고 있어 약간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모두 같은 무덤을 지칭하고 있다고 판단된다. 강화부 서쪽 고려산 기슭에는 현재의 홍릉을 제외하면 왕릉으로 볼 만한 무덤이 확인되지 않기 때문이다. 고려 후기의 혼란기와 조선 전기 고려왕릉에 대한 무관심으로 왕릉을 잃어버렸으나, 1664년 강화유수로 봉직하였던 조복양(趙復陽)이 다시 찾아 쌓은 뒤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16년 조사 기록에 의하면, 능역은 석축대를 쌓아 3단으로 구획하고, 최상단에는 호석과 난간의 일부로 구성된 봉분과 4마리의 방주형(方柱形) 석수(石獸)를 배치하였다. 제2단에는 고종 4년(1867)에 세운 표지석과 두 쌍의 석인상이 마주 보고 서 있었고, 제3단에는 정자각의 기단 지대석의 일부가 남아 있다고 하였다.
현재의 능역은 남북 25m, 동서 17.5m의 규모로 3단으로 구획되어 있다. 최상단에는 봉분과 사성(莎城)이 설치되어 있으며, 제2단에는 석인상 4구와 근래 설치한 혼유석이 자리하고 있다. 동편에 난간에 사용되었던 난간 동자주를 모아 놓았다. 3단은 별다른 시설물이 없는 평탄지이다.
1974년 보수 · 정비하면서 능역의 모습이 상당 부분 변형되었기 때문에 발굴 조사를 통해 홍릉의 본래 모습을 찾아 줄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