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릉 ()

고려시대사
유적
북한 개성특별시 장풍군 월고리에 남아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고려 후기 제22대 국왕 강종의 능.
유적/고인돌·고분·능묘
양식
건립 시기
1213년
관련 국가
고려
관련 인물
강종
소재지
개성특별시 장풍군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후릉(厚陵)은 북한 개성특별시 장풍군 월고리에 남아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고려 후기 제22대 국왕 강종의 능이다. 1213년 수창궁에서 강종이 승하하자 안종 무릉 옆에 무덤을 만들었다. 그러나 무릉과 후릉이 풍수에 맞지 않아 그때마다 외세의 침입이 있었다는 주장에 따라 이장을 추진하려고 했으나 실제 이장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장풍군 월고리 금신봉 중턱에 2기의 왕릉이 남아 있는데, 이 중 하나가 후릉일 가능성이 높다. 고종 연간에만 세 차례에 걸친 도굴이 있었다.

정의
북한 개성특별시 장풍군 월고리에 남아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고려 후기 제22대 국왕 강종의 능.
건립경위

강종(康宗)명종(明宗)의 장자(長子)로 태어나 1173년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그러나 1197년 당시 실권자였던 최충헌에 의해 부왕(父王)과 함께 자리에서 쫓겨나 강화도로 유배되었다.

이후 희종(熙宗)의 부름으로 14년간의 유배 생활에서 벗어나 개경으로 돌아왔고, 최충헌 살해 모의를 구실로 희종을 폐한 최충헌에 의해 옹립되어 왕위에 올랐다. 재위 2년 만인 1213년 8월 수창궁(壽昌宮) 화평전(和平殿)에서 62세의 나이로 승하하자 다음 달 후릉(厚陵)에 장사를 지냈다.

변천

고려사(高麗史)』 세가에는 왕이 사망하면 시호, 묘호, 장지, 능호를 순서대로 기록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강종은 시호, 묘호, 능호만 기록하고 장지를 기록하지 않았기 때문에 후릉의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다.

다만 『고려사』와 『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 후릉이 안종(安宗) 무릉(武陵) 옆에 만들어졌고, 풍수에 맞지 않다는 이유로 이장을 하기 위해 개장후릉도감(改葬厚陵都監)을 설치하였다가 곧바로 없앴다고 한 것으로 보아 후릉은 무릉이 있는 개성특별시 장풍군 월고리에 있으며 실제 이장은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본다.

현재 무릉이 위치한 월고리 금신봉 중턱에는 2기의 왕릉급 무덤이 약 50m 간격을 두고 위 · 아래에 자리하고 있는데, 이 중 하나가 후릉으로 추정된다.

형태와 특징

능의 구조는 위치조차 파악할 수 없기 때문에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같은 시기 왕릉들과 비교하면 어느 정도 유추해 볼 수는 있다. 이즈음 왕릉은 얕은 경사면에 가로 20m, 세로 40m 정도의 능역을 계단식으로 조성하고, 봉분과 각종 치장 석물, 정자각을 왕릉 제도에 따라 배치하였다.

매장 주체부는 봉분 아래 지하에 설치하였는데, 남쪽에 문을 낸 장방형의 횡구식 석실이다. 석실 바닥의 중앙에 돌로 만든 관대를 설치하고 주변에 전돌을 깔았으며, 바닥을 제외한 전면에 회칠을 하고 당시 제도에 맞추어 벽화를 그렸다. 후릉의 구조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고 판단된다.

의의 및 평가

몽골의 침입과 강화 천도 등 고려 후기의 혼돈기를 거치면서 고려왕릉에 대한 관리가 소홀해진 틈을 타 많은 왕릉들이 도굴되었는데, 특히 후릉은 고종 연간에만 세 차례 도굴되었다. 이후 능의 위치를 잃어버린 것으로 판단된다.

참고문헌

원전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단행본

장경희, 『고려왕릉』(예맥, 2008)
전룡철, 『개성의 옛자취를 더듬어』(문학예술출판사, 2002)

논문

홍영의, 「조선시대 고려왕릉의 현황과 보존 관리 실태」(『한국중세고고학』 5호, 한국중세고고학회, 2019)
이상준, 「고려왕릉의 구조 및 능주 검토」(『문화재』 45-2호, 국립문화재연구소,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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