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려사(高麗史)』 세가에는 왕이 사망하면 시호, 묘호, 장지, 능호를 순서대로 기록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강종은 시호, 묘호, 능호만 기록하고 장지를 기록하지 않았기 때문에 후릉의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다.
다만 『고려사』와 『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 후릉이 안종(安宗) 무릉(武陵) 옆에 만들어졌고, 풍수에 맞지 않다는 이유로 이장을 하기 위해 개장후릉도감(改葬厚陵都監)을 설치하였다가 곧바로 없앴다고 한 것으로 보아 후릉은 무릉이 있는 개성특별시 장풍군 월고리에 있으며 실제 이장은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본다.
현재 무릉이 위치한 월고리 금신봉 중턱에는 2기의 왕릉급 무덤이 약 50m 간격을 두고 위 · 아래에 자리하고 있는데, 이 중 하나가 후릉으로 추정된다.
능의 구조는 위치조차 파악할 수 없기 때문에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같은 시기 왕릉들과 비교하면 어느 정도 유추해 볼 수는 있다. 이즈음 왕릉은 얕은 경사면에 가로 20m, 세로 40m 정도의 능역을 계단식으로 조성하고, 봉분과 각종 치장 석물, 정자각을 왕릉 제도에 따라 배치하였다.
매장 주체부는 봉분 아래 지하에 설치하였는데, 남쪽에 문을 낸 장방형의 횡구식 석실이다. 석실 바닥의 중앙에 돌로 만든 관대를 설치하고 주변에 전돌을 깔았으며, 바닥을 제외한 전면에 회칠을 하고 당시 제도에 맞추어 벽화를 그렸다. 후릉의 구조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고 판단된다.
몽골의 침입과 강화 천도 등 고려 후기의 혼돈기를 거치면서 고려왕릉에 대한 관리가 소홀해진 틈을 타 많은 왕릉들이 도굴되었는데, 특히 후릉은 고종 연간에만 세 차례 도굴되었다. 이후 능의 위치를 잃어버린 것으로 판단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