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평왕후(成平王后)는 종실인 영인후(寧仁侯) 왕진(王稹)의 딸이지만, 왕실과의 동성(同姓)을 피해 임씨 성을 사용하였다. 1211년(희종 7)에 정식 왕비로 책봉되어 함평궁주(咸平宮主)로 봉해졌다. 모두 10명의 자녀를 낳았는데, 그중 장녀가 고종의 비인 안혜태후(安惠太后)이다.
왕비로 책봉된 지 8개월 만에 왕준명(王濬明)이 주도한 최충헌 살해 모의가 발각되면서 희종과 함께 폐위되었다. 1247년(고종 34)에 강화에서 승하하여 소릉(紹陵)에 장사 지냈다. 그러나 장지(葬地)를 기록하지 않아 무덤을 특정할 수 없는 상태이다.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희종 석릉, 원덕태후 곤릉, 순경태후 가릉, 고종 홍릉 등 4기의 고려왕릉에 대하여 강화부를 기준으로 방향과 거리를 기록하였다. 이후 1664년 강화유수로 봉직하였던 조복양(趙復陽)이 다시 찾아 쌓았고, 이를 참고하여 『 강도지(江都誌)』, 『 여지도서(輿地圖書)』에는 강화부에서의 방향과 거리, 장소까지 밝히고 있다.
하지만 조선시대의 모든 기록이 상기한 4기의 왕릉만을 대상으로 하였고, 소릉에 대하여는 기록하지 않았다. 이 점은 『신증동국여지승람』이 간행되기 이전에 이미 소릉을 잃어버렸고 다시 찾으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현재 소릉으로 추정되는 곳은 내가면 황천리, 내가면 외포리, 양도면 능내리이다. 황천리는 소릉고개라는 지명만 전해지고 있는 상태이고, 외포리는 외포리고분군 안에 소릉이 있다고 전해져 왔으나 지표 조사 결과 왕릉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밝혀졌다. 능내리에는 2기의 왕릉이 남아 있는데, 강화 가릉과 강화 능내리 석실분이다.
발굴 조사 결과, 두 무덤은 모두 고려시대 왕릉인 횡구식 석실분이고 능내리 석실분이 가릉보다 먼저 만들어졌다. 능내리 석실분이 가릉보다 위계가 높으며, 묻힌 사람은 모두 여성이었다. 강화에서 사망한 왕후는 세 사람이다. 이 중 원덕태후의 무덤은 양도면 길정리로 비정되기 때문에 이 두 무덤은 순경태후와 성평왕후의 무덤일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순경태후가 성평왕후보다 10년 먼저 승하하였고, 승하 당시 폐비의 신분이었던 성평왕후에 비해 세손인 충렬왕을 낳은 태자비의 신분이었던 순경태후의 위계가 높았다. 따라서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는 가릉이 소릉이고, 능내리 석실분이 가릉일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이처럼 소릉은 개경 환도(還都) 이후 관리 소홀로 비록 무덤을 잃어버렸으나, 함평궁주라는 글자가 새겨진 향완(香垸)에서 보듯이 성평왕후의 위상은 결코 무시할 수 없다. 소릉으로 추정되는 장소에 대한 발굴 조사를 통해 그 위치를 찾아 위상을 찾아 줄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