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조선 후기에, 형조판서, 대제학, 이조판서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생애 및 활동사항
1649년(효종 즉위년) 지평을 거쳐 부교리가 되었는데, 붕당의 폐를 주장하다가 오히려 원두표(元斗杓)의 당으로 지목되어 왕의 미움을 샀으나 조석윤 등의 신구로 무사하였다. 1651년(효종 2) 그의 아버지 익이 쓴 윤방(尹昉)의 시장(諡狀) 문제로 의금부에 감금되었다가 곧 풀려났으나, 벼슬에는 나가지 못하였다.
1653년 헌납으로 복직된 뒤, 부교리·이조정랑을 역임하고 집의가 되었다. 그러나 사적인 감정으로 사천(史薦)을 마음대로 막았다고 하여 파직되었다가 또다시 조석윤의 파직 환수 주장에 의해 종성부사로 밀려났다. 그 뒤 서원리(徐元履) 등의 적극적인 주장으로 다시 겸보덕으로 돌아와 집의·겸필선·사간·응교를 역임하였다.
1657년 시강관(侍講官)으로 궁중음악의 타락을 지적, 고악(古樂)을 본받아 이를 시정할 것을 주장하고, 악장옥책교문(樂章玉冊敎文)을 지었다. 이듬해 응교로서 서필원(徐必遠)의 많은 기생을 둔 것을 비방하다가 효종의 미움을 샀으나 송준길(宋浚吉)의 구원으로 다시 부응교가 된 뒤 1659년 이조참의가 되었다.
현종이 즉위하면서 적극적인 진휼정책의 이행을 주장하였다. 1660년(현종 1)에 대사성, 이듬해에는 대사간으로 별도로 설치된 진휼청당상(賑恤廳堂上)이 되어 흉년으로 기아에 있는 백성들을 구제하는 데에 힘썼다. 그 뒤 부제학·예조참판·병조참판·동지성균관사·강화유수를 역임하고 여러 차례 대사성을 지낸 뒤 원자(元子)의 보양관(輔養官)이 되었다.
1668년에는 예조판서로 대제학을 겸하여 정시(庭試)를 총괄했으나, 과거의 시제(試題)가 같은 것을 두 번 출제한 실수로 이듬해에 파직되었다가 곧 형조판서로 돌아왔다. 그 뒤 우참찬·대제학·이조판서·예조판서를 역임하였다. 광주(廣州)의 명고서원(明皐書院)에 제향되었고, 저서로 『송곡집』이 있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참고문헌
- 『인조실록』
- 『효종실록』
- 『현종실록』
- 『현종개수실록』
- 『숙종실록』
- 『영조실록』
- 『정조실록』
- 『국조방목』
- 『연려실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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