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7년 10월 선교 활동을 하던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배위량(裵緯良, W. M. Baird)이 기독교 정신에 입각한 중등교육을 실시하기 위해서 평안남도 평양 신양리 자신의 집에서 학당으로 문을 열었다.
입학 연령에 제한을 두지 않아 16세에서 36세까지의 학생 13명으로 출발하였으며, 이듬해에는 60명이 지원하여 18명을 선발하였다. 1900년 수업연한을 5년으로 하고 초등교육을 마친 사람을 입학 대상으로 하였다. 초기에는 성경·한문·산수·역사·음악 등을 가르쳤으나 1900년경부터 조선어·음악·수학·위생학·미술·체조·식물학·성경·천로역경·지리 등으로 교과목을 늘려 가르쳤다.
1901년소안론(蘇安論) 선교사의 기부금으로 한식 기와로 된 2층 교사를 신축하면서 교명을 숭실학당(崇實學堂)으로 명명하였고, 1904년 제1회 졸업생 3명을 배출하였다. 그 뒤 교육열의 고조로 고등교육의 필요성이 부각됨에 따라 1906년 9월 대학부를 설치하고, 중학부는 숭실중학교, 대학부는 숭실대학이라 명하였다.
1928년 성경 과목과 종교의식을 폐지하면 고등보통학교로 인가한다는 조선총독부의 회유에 굴하지 않고 계속 기독교 교육을 실시하다 진학 및 취직에 제한을 받게 되는 지정학교(指定學校)로 격하되었다.
1930년대 중반 이후부터 계속된 신사참배 강요를 거부하다가 1938년 3월평양의 숭실전문학교·숭의고등여학교와 함께 자진해서 폐교함에 따라, 33회 1,257명의 졸업생을 배출한 뒤 개교 41년 만에 문을 닫게 되었다.
광복과 함께 졸업생을 중심으로 학교의 재건을 추진하여 1948년 9월서울시 성동구 신당동에서 학생 52명, 교원 7명의 숭실중학교로 재개교하였다. 1953년서울 중구 회현동에 있던 성도교회로 교사를 이전하였다가, 이듬해 4월 3학급의 숭실고등학교로 정식 인가를 받아 서울 용산구 용산동으로 이전하였다.
1975년서울시 은평구 신사동 현재의 위치에 교사를 신축하여 이전하였으며, 1982년 도서관을 개관하고, 1999년 백주년 기념관을 준공하였다. 2002년 5층 규모의 정보센터를 개관하고, 2005년 2월 사이버스쿨을 개강하였다.
개화기에 설립되어 평양을 중심으로 한 서북지방의 근대 중등교육에 큰 몫을 담당하였고, ‘진실 숭상’을 의미하는 교명 ‘숭실’의 정신대로 을사조약 체결되자 반대시위를 벌였다.
일제강점기에는 105인사건, 3·1운동, 광주학생운동, 신사참배 거부 등 항일운동과 구국운동에 앞장서 105인사건에서는 졸업생인 차이석·변인서·곽태종·김두화·길진형·윤원삼·안세환 등이 검거되어 대거 실형을 선고받기도 했다.
2010년 현재 42학급에 총 1,500여 명의 학생이 재학하고 있고, 교직원은 95명이 재직하고 있다.
교훈은 ‘참과 사랑에 사는 사명인’이다. 건학이념인 민족정신과 기독교신앙을 바탕으로 하여 ‘진리탐구·봉사정신·자유구현’의 실천에 힘쓰고 있으며, 신앙과 영적 수월성, 인간교육의 수월성, 지적 수월성을 지향하고 있다.
현재 선교부·미술반·서예반·합창부 등의 동아리를 중심으로 계발활동이 이루어지고 있고, 운동부는 1911년에 창단된 축구부가 있다. 1997년 개교 100주년 기념식을 거행하였고, 1997년, 1999년, 2001년 학교평가 우수학교에 선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