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공관(市公館)은 1936년에 일본인 이시바시〔石橋良祐〕가 세운 극장으로, 광복 전까지의 명칭은 메이지자〔明治座〕였다. 서울특별시 명동에 자리잡은 이 극장은 1930년대 일본인들의 위락시설로 지어졌기 때문에 주로 일본영화를 상영하였다. 광복 후에도 한 동안은 일본의 소유로써 국제극장(國際劇場)으로 불리었고 서울시가 접수하여 시공관으로 개칭하였다.
이 극장은 대지 505평, 건평 749평, 객석 1,180석의 3층건물로서 설립 당시에 시내 중심지에 있었기 때문에 중요한 공연장의 역할을 담당했다. 1959년 뒤늦게 환도한 중앙국립극장(극장장 서항석)이 본거지를 물색하던 중 시공관을 공동 사용하기로 결정하고서 같은 해 6월 1일에 ‘국립극장’으로 간판을 달아 사용하였다.
1961년 11월 ‘정부조직법’이 개정되고 국립극장이 공보부(公報部)로 이관됨에 따라 시공관은 국립극장 전용공연장이 되었으며, 자연 시공관의 명칭도 없어졌다. 1973년 국립극장이 장충동 신축 건물로 이전하면서 예술극장(藝術劇場)으로 개칭되었다. 그러나 이 극장이 1976년에 연금특별재산으로 정부 총무처로 넘어가면서 1975년 말에 결국 맥은 끊어졌다.
국립극장의 전속단체가 공연한 횟수는 교향악단을 제외하고 연극 66회, 창극(唱劇) 15회, 무용 11회, 오페라 13회 등 총 105회에 이르렀다. 국립극장 전용극장이 된 1963년 이후 예술극장으로 문을 닫게 된 1975년까지 13년간의 대관공연은 연극만도 모두 295편에 이르러 우리나라 공연예술의 산실이었다.
이후 이 극장은 오랜 기간 동안 금융기관 영업장으로 사용되다 2009년 6월 5일 ‘옛 명동 국립극장 복원사업’으로 옛 모습 그대로 복원하여 ‘문화가 숨쉬는 도시’를 지향하며 ‘명동예술극장’이라는 이름으로 재개관을 하였다.
현재 재단법인 명동·정동극장이 명동예술극장을 운영하고 있다, 극장의 객석수는 1층 339석, 2층 116석(장애인용 휠체어 좌석 6석 포함), 3층 103석 등 총 558석의 규모의 연극전문 전용극장으로 단장되었다.
시공관은 1950∼1970년대까지 20여년 동안 우리나라 공연예술, 특히 연극의 유일한 전당이었다는데에 그 의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