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양평(楊平: 지금의 驪州) 출신으로 어려서 일본에 가 있다가 20세 때인 1906년에 귀국한 뒤 대한제국 정부의 내부 위생과장, 제실(帝室) 회계심사위원 등을 지낸 친일파 민원식(閔元植)은 ‘시사신문’이라는 이름으로 두 번에 걸쳐 일간지를 발행하였다.
첫 번째 『시사신문』은 한일합병 직전인 1910년 1월 1일에 창간되었다. 사장은 민원식, 발행인은 백낙균(白樂均)이었다. 창간호에 통감 소네〔曾彌荒助〕의 축필 휘호를 1면에 실었으며, 친일적 제작태도로 국민들의 지탄을 받았다. 민원식이 일진회(一進會) 회원으로서 정우회(政友會) 발기에 가담하였기 때문에 시사신문은 정우회의 기관지 같은 성격을 띠었다. 이 때문에 독자들도 이 신문을 외면하였다. 1910년 5월 8일까지 100호를 발간했으나, 사원들의 월급은 3개월 동안이나 지불하지 못한 채 재정난으로 휴간한 후 속간하지 못했다.
민원식이 두 번째 『시사신문』을 창간한 것은 1920년의 일이다. 그는 3·1운동 직후 매일신보에 〈소요의 원인과 광구예안(匡救例案)〉이라는 글을 8회에 걸쳐 연재하면서 3·1운동을 비난하였다. 3·1운동 뒤에 총독부가 한국인에게 3개의 민간지를 허용해주겠다는 방침을 정하자 민원식은 자신이 주재하던 협성구락부(協成俱樂部)를 국민협회로 개칭하여 그 기관지로 총독부의 허가를 얻어 4월 1일 『동아일보』와 같은 날 창간하게 된 것이다. 이 때 사장 민원식, 부사장 김명준(金明濬), 주간 이동우(李東雨), 편집주임 김환(金丸), 경리주임 방한복(方漢復)이었다. 그러나 친일적인 논조로 말미암아 이 신문이 같은 때에 창간된 『동아일보』·『조선일보』와는 달리 독자의 인기를 끌지 못하자, 이 해 10월에는 편집국장을 윤교중(尹敎重, 일명 尹白南)으로, 경리국장을 김상회(金商會, 또는 金尙會)로 교체하였다.
친일적인 인물로 구성된 이 신문은 민원식이 조선인의 참정권 청원을 목적으로 일본에 갔다가 1921년 2월 16일 항일투사 양근환(梁槿煥)에게 암살당한 뒤 자연스럽게 폐간되었다. 이후 시사신문은 일간지를 포기하고 월간지인 『시사평론』으로 개제했다.
1920년대의 『시사신문』의 원본은 현재 일본 이와테〔岩手〕현 오슈〔奧州〕시 미즈사와〔手澤〕구에 위치한 사이토 마코토〔齊藤實〕 기념관에 약 10일치가 소장되어 있고 마이크로필름도 제작되었다. 국사편찬위원회가 이 마이크로필름을 복제하여 소장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