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22일 황국협회(皇國協會)가 서울 중서(中署) 정선방(貞善坊) 하한동(下漢洞)에서 창간하였다.
사주 겸 발행인에 홍중섭(洪中燮), 편집인은 장지연(張志淵)이었다. 격일간제 국한문혼용으로 B4판 4면 4단제(1단 34행, 1행 16자)였으며, 지대는 1매당 엽전 5푼, 한 달에 엽전 6돈[錢]이었다.
논조는 보수적이고 친정부적이었으며, 지면구성은 당시의 일반신문과 같이 관보·논설·잡보·광고 등의 각 부문으로 나누고 시사(詩詞)와 국조고사(國朝故事) 등도 게재하였다.
1899년 5월 23일자에 ‘구행개화호접래(狗杏開花虎蝶來)’라는 글귀에 대구(對句)를 현상모집하였는데, 이것은 신문이 문예작품을 현상모집한 첫 기록이 된다.
이 신문이 황국협회 계열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다른 여러 설도 있으나, 『상무총보(商務總報)』를 발행한 황국협회의 간부였던 길영수(吉永洙)와는 또 다른 계열의 사람들이 주도하였다.
1899년 8월 17일까지 제100호를 발행하였으나 재정난으로 문을 닫은 다음, 고서출판사업의 전문회사인 광문사(廣文社)로 개편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