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에는 가을파지보(加乙波知堡)라 하였으며, 1500년(연산군 6) 주위둘레 610척(尺), 높이 8척의 석성(石城)을 쌓고, 권관(權管) 1인을 두었다고 한다.
압록강의 상류는 강폭이 좁고 유량도 적은 편이나 신갈파진을 지나면서부터는 수량이 많아지고 강의 너비도 갑자기 넓어진다. 더욱이 신갈파진은 부전강을 합류한 장진강이 다시 압록강으로 합류하는 지점에 위치하므로 이곳은 큰 배가 닿을 수 있을 정도의 하항이 된다. 그러므로 광복 전에는 신의주와 신갈파진 사이에 여객을 수송하는 프로펠러를 단 내항선이 통하고 있었다.
신갈파진은 혜산시와 함께 압록강 상류나 개마고원에서 벌채되는 원목을 집산하는 임산도시로 유명하였으며, 이곳에서 떼로 엮어 압록강 하류에 있는 중강진ㆍ만포ㆍ신의주 등으로 떠내려 보내는 중계항으로서의 기능도 다하였다.
신갈파진에서 4㎞ 가량 하류 쪽에 원래의 가을파지보였던 구갈파진(舊乫坡鎭)이 있고, 그 중간 지점에는 예로부터 하항선의 정박지로 활기를 띠었던 박주호(泊舟呼)라는 지명의 포구가 있다. 근년에는 압록강안을 따라 강계에서 신갈파진을 지나 혜산에 이르는 철도와 자동차도로가 지난다고 한다.
광복 전에는 간도(間島)에서 활동하던 독립지사들이 자주 건너와서 주민들에게 민족혼을 깨우치는 일이 잦았으므로 일본인들은 국경수비대를 주둔시켰으며, 작은 마을인데도 경찰서와 헌병 1개 분대를 상주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