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5년 12월호인 『개벽(開闢)』 64호에 발표되었다. 이 글을 쓰기 이전 박영희는 개벽사에 입사하였고 또한 프로문학운동에 열을 올리기 시작하였다. 『개벽』 64호에는 이 글 이외에도 「준비시대에 있는 바로로프의 부정적 정신(否定的精神)」이 실려 있다. 이로 미루어보아도 그의 프로문학에 대한 열기가 짐작된다.
이 글은 전편이 여섯 개의 부분으로 구분되어 있는데, 먼저 1에서 3까지의 부분에서 박영희는 부르주아문학의 배제와 프로문학의 전개가 불가피하다고 주장하였다.
“이제 우리는 그와 같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오랫동안 고민하던 조선을 해방하자! 따라서, 그 외피(外皮)를 뒤집어쓰고 흐느적거리던 문학을 해방하자!…… 기형적으로 발달한 부분적 생활을 마취시키는 문학은 말고 생활의 수평적 향상을 위한 민중적 문학을 건설할 때가 이르렀다. 이것으로 전조선은 보조를 같이하여야 한다.”라고 주장한다.
이어 이른바 민중적 문학의 보기로 김기진(金基鎭)의 「붉은 쥐」(『개벽』, 1924.11.), 조명희(趙明熙)의 「땅속으로」(『개벽』, 1925.3.), 이익상(李益相)의 「광란(狂亂)」(『개벽』, 1925.3.), 이기영(李箕永)의 「가난한 사람들」(『개벽』, 1925.5.), 주요섭(朱耀燮)의 「살인」(『개벽』, 1925.6.), 최학송(崔鶴松)의 「기아와 살육」(『조선문단』, 1925.6.), 이상화(李相和)의 「가상(街相)」(『개벽』, 1925.5.) 등을 예로 들고 있다.
또한 박영희의 「전투」(『개벽』, 1925.1.), 박길수(朴吉洙)의 「땅파먹는 사람들」(『개벽』, 1925.7.), 송영(宋影)의 「늘어가는 무리」(『개벽』, 1925.7.), 최문(崔文)의 「두 젊은 사람」(『개벽』, 1925.8.) 등을 손꼽았다. 그에 따르면 이들 작품은 명백히 종래의 부르주아문학과는 다른 고민이 담겨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내용이 파괴·살인·조소에 그치고 있어서 불만이라고 보았다. 박영희는 여기서 신경향파문학이 계급과 생사를 같이하는 투사의 문학으로 탈바꿈해야 한다고 말하며, “무산계급문학의 문사는 문학에만 머무르고 있는 것이 아니라, 계급 그것과 생사를 같이하지 않으면 아니 될 제3선상(第三線上)에 서 있는 투사인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라고 하였다. 이 글을 비롯하여 이 시기 발표된 박영희와 김기진의 일련의 글들은 이후 우리 문단에 큰 영향을 준 프로문학의 발전을 이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