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영산(靈山). 본명은 신건호(申建湖)이며 동문(東門)은 필명이다. 충청북도 청주 출신으로 2남 3녀 중 차남이다.
어려서부터 병약하여 소학교와 중학교를 몇 차례씩 휴학했다가 다시 편입하곤 하였다. 청주주성중학교를 거쳐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에 입학한 뒤 곧 휴학, 동국대학교로 옮겼으나, 6개월도 못 다니고 폐결핵으로 다시 휴학하였다.
군에서 제대한 뒤에는 충북일보사와 사회일보사 등에서 논설위원을 지냈다. 1960년경에는 『새벽』지 편집장, 『사상계』 편집장, 『경향신문』 기획위원, 1970년대 초에는 신구문화사 주간, 창작과 비평사 대표 등을 역임하였다. 말년에는 충청북도 단양으로 귀농하여 농장을 경영하며 소박한 전원생활을 즐겼으며, 바둑을 좋아하였다.
그의 시작 활동은 1953년『한국일보』 신춘문예와 1954년『동아일보』 신춘문예에 각각 가작으로 당선됨으로써 시작되었다. 1956년『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 「풍선기(風船期)」가 당선되어 문단에 정식으로 등단하였다. 1956년 처녀시집 『풍선(風船)과 제3포복(第三匍匐)』을 간행하였다. 이 시집에는 공군에 복무하면서 틈틈이 써 모은 작품들이 수록되어 있다.
이어 시 「수정화병(水晶花甁)에 꽂힌 현대시(現代詩)」(『현대문학』, 1957.7.)·「조건사(條件史)」(『사상계』, 1957.12.)·「조건사초(條件史抄)」(『현대문학』, 1958.10.)·「무제(無題)」(『현대문학』, 1959.2.) 등을 발표하여 주목을 끌었다. 한편 1963년에는 동인지 『현실』을 주재하였다. 1960년대 중반 이후에는 시를 거의 발표하지 않았다.
그의 시는 비판적 지성을 바탕으로 자기 시대의 삶을 예리하게 관찰하고 풍자적으로 표현하는 데 뛰어났다. 다분히 현실 참여적인 경향을 지니고 있으며, 이른바 ‘앙가주망(engagement, 현실참여)의 시인’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특히, 그의 초기 시는 전쟁의 파괴적인 요소와 전후 사회의 황폐상을 잘 나타낸 것으로서 1950년대 후반에 크게 관심을 끌었다. 1955년 제1회 충북문학상, 자유문학상을 수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