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 96자로 이루어진 유훈의 글로, 「훈요십조(訓要十條)」의 간단한 서문에 해당된다. 3차에 걸친 거란의 병란에 의해 고려의 『칠대실록(七代實錄)』이 소실되면서 이 글과 「훈요십조」가 일실되었는데, 문종 때 태사 문하시중(太師門下侍中)을 지낸 최제안(崔齊顔)이 최항(崔沆)의 집에 보관되었던 것을 찾아냄으로써 지금까지 전해지게 되었다. 그 내용은, “내가 듣건대 대순(大舜)은 역산(歷山)에서 농경을 하다가 마침내 요(堯)의 선위를 받았고, 한나라 고조(高祖)는 패택(沛澤)에서 일어나 드디어 한나라의 제업(帝業)을 일으켰다고 한다. 나도 또한 미천한 가문에서 일어나 잘못 사람들의 추대를 받아 여름에는 더위를 두려워하지 않고 겨울에는 추위를 피하지 않았으며, 몸과 마음을 괴롭힌 지 19년 만에 삼한(三韓)을 통일하였고, 외람되게 왕위에 있은 지 25년이 되어 몸은 이미 늙었노라. 다만, 후손들이 정욕(情慾)을 함부로 부려 기강을 어지럽힐까 크게 근심하는 바이다. 이에 훈요를 지어 이를 후세에 전하노니, 바라건대 아침 저녁으로 펴보아 영원히 귀감으로 삼아야 한다.”라는 것으로, 「훈요십조(訓要十條)」를 지어 남겨둔 동기와 목적을 기술하고 있는 글이라 할 수 있다. →훈요십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