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아일보는 1965년 5월 6일 장기봉(張基鳳)이 서울특별시 중구 서소문동에서 창간하였다. 사시(社是)는 ‘자유·중립·공익’이었으며, 발행인 겸 사장은 장기봉, 편집국장은 윤임술(尹壬述)이었다.
많은 신문이 창간할 때는 의례 언론의 자유라든지 문화의 향상을 주장하지만, 이 신문은 창간사에서 ‘상업신문’임을 밝히고 나섰다. 대판 8면의 석간으로 간행된 이 신문은 신문 이외의 어떤 방계사업도 없이 순수하게 신문수입만으로 경영한다는 방침에 따라 창간 초기부터 극소수의 인원만으로 신문을 제작하였다.
창간 당시 편집국 인원은 18명에 지나지 않았으며, 이들만으로 매일 8면의 지면을 제작하여 신문계에서 ‘기적의 신문’이라는 평을 얻기도 하였다. 그러나 수십 년의 연륜을 가진 신문들과 경쟁하기 위하여 다양하게 지면을 구성하고 실생활을 파고드는 신문을 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재정난을 이기기 어려워 고전하였다.
이 신문은 1980년 언론기관 통폐합조처에 따라 『경향신문(京鄕新聞)』에 흡수, 통합되어 11월 25일에 종간되었다. 2000년대 초 이 신문은 제호 무단도용 사건에 휘말리기도 하였다. 종간 이후 전(前)사장인 장기봉(張基鳳)은 1999년 7월 법인으로 설립된 신한일보사가 처음에는 『신한일보』라는 제호를 사용하다가 2003년 5월 6일 자부터 제호를 『신아일보』로 바꾸면서 1면 상단에 “1965년 5월 6일 창간”“제5056호” 등 창간 일자와 지령을 무단 도용했다고 하여 제호, 지령, 창간 일자의 사용을 금지하는 가처분 신청과 명예훼손 및 상표권 침해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하였고, 2005년 2월 법원으로부터 승소판결을 받았다.
신아일보는 독자투고란인 ‘세론(世論)’을 마련하여 본격적인 독자참여제도의 문을 열었으며, ‘종교란’을 최초로 만들어 종교계로부터 환영을 받았다.
이밖에도 ‘수도권백과’나 ‘재계화제’의 난을 신설하는가 하면, 농수산소식·소비자 페이지·부부교실·부동산 등의 난을 만들어 생활경제정보를 전달하는 일에 앞장서기도 하였다.
이 신문은 창간호부터 다색도인쇄(多色度印刷)로 발행하여 국내 다색도인쇄의 효시가 되었다. 창간 초기 다색도인쇄에 컬러만화를 게재하여 인기를 끌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