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 10월 일본 쓰키지(築地)소극장에서 한국인 배우로 활약하다가 귀국한 홍해성(洪海星)을 중심으로 당시 중진 연극인이었던 윤백남(尹白南)·박승희(朴勝喜)·이기세(李基世)·홍노작(洪露雀)·최승일(崔承一) 등이 경성소극장(京城小劇場)이라는 극단을 창립하고자 하였으나, 이상화(李相和)가 자금을 제공하지 못하여 공연도 해보지 못한 채 무산되었다.
그러자 홍해성은 친구이자 개성(開城)의 부호(富豪) 고한승(高漢承)을 설득하여 자금을 마련, 10월에 극단 신흥극장(新興劇場)을 조직하였다. 이 극단은 처음에는 신흥극단(新興劇團)이라 명명했으나, 후에 신흥극장으로 개칭되었다.
극단의 구성은 쉬고 있던 토월회(土月會) 멤버들을 중심으로 조직되었다. 연출부 홍해성을 필두로 하여 문예부에 홍노작·최승일·박희분(朴熙芬), 미술부에 원우전(元雨田), 연기부에 이백수(李白水)·박제행(朴齊行)·이소연(李素然)·심영(沈影)·석금성(石金星)·강석제(姜石齊)·강석연(姜石燕)·김연실(金蓮實)·이호영(李鎬榮)·이화백(李花白)·염유일(廉幽逸)·홍도무 등 15명으로 이뤄졌다.
신흥극장이 선택한 창립공연 작품은 쓰키지소극장에서 했던 「모란등기(牧丹燈記)」였다. 중국의 「전등신화(剪燈神話)」를 일본 프롤레타리아 작가 세이키지 후지모리(藤森成吉)가 개작한 것을, 이기영 번역·홍해성 연출로 공연했다.
중국영사관과 재경중국인총상회(在京中國人總商會)의 후원으로 의상·배경·음악 등에 중국적 정취를 살렸으나 공연은 예상 밖으로 실패하였다. 기대를 모았던 홍해성의 귀국작품이 실패로 끝나자 신흥극장은 개막 3일 만에 해산되고 말았다.
이 극단은 1회 공연밖에 가지지 못했지만, 일본에서 본격적으로 신극을 배우고 온 홍해성의 첫 귀국무대를 보여주었다는 점과 쓰키지소극장식 공연방식을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실험하였다는 데 의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