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변시일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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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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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미상의 영해민란에 관해 기록한 야사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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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저자 미상의 영해민란에 관해 기록한 야사집.
내용

1책 25쪽. 필사본. 경상도 영해에 거주하던 의령남씨의 한 사람이 저자인 듯하다. 1871년(고종 8) 3월 10일 이필제(李弼濟)가 일으킨 영해동학란(寧海東學亂)에 관한 기록이다. 보수적인 향촌 양반의 시각에서 병란의 경과와 수습 과정을 중점적으로 기술하였다.

이 책은 1860년 창도된 동학(東學)이 영해에서 성행했던 사실, 병란과 영해 신반(新班)의 관계, 향촌 양반의 대응, 관의 사후 조처 등을 잘 보여주는 좋은 자료이다. 중요한 내용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동학이 영해에 처음 전파된 때는 1864∼5년경이다. 영해는 다른 지역의 교도들과 연락 관계를 가지면서 사는 마을로 무리를 모아 신앙을 했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구반(舊班)들이 경고를 하기도 하고 교제를 끊었던 일이 있었고 경상감영에 체포된 자들까지 나왔음을 밝히고 있다. 그런데 동학교도의 중심이 신반인 서족(庶族)이었다는 지적은 인간평등의 사상을 가진 동학이 실제로 신분적 질곡에 고통받던 신분층에게 큰 호응을 얻었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다.

또한 영해병란의 가담자로서 체포된 자들이 바로 그들이었다고 한다. 이필제가 관아를 떠난 후, 영덕 등지에서 관군이 들이닥쳐 가담자를 색출하는 한편 추격에 나섰다. 향중에서도 향교의 도유사(都有司)가 향원(鄕員)들에게 글을 보내 장정과 노속을 모으도록 해서 관군을 돕고, 감시 초소를 짓고 행인을 감시하고 병란 가담자를 체포하였다.

그리고 병란 가담자들이 일원산에 도망해서 영해부사 인부(印符)를 걸어 놓고 천제(天祭)를 지냈고, 그 가운데 장사가 있었는데 천명이라고 하며 순순히 잡혔다고 기록하였다.

또한 이필제가 둔갑술에 뛰어나 변화를 종잡을 수 없었고, 도망자들이 밤에 영양 관아의 뒷산에 올라가 영해란은 의거(義擧)이며 자기들은 의사(義士)인데 계속 체포하면 도륙하겠다고 외쳤다는 등 병란에 따른 사실과 소문을 적고 있다. 영덕군지(盈德郡誌)에는 남경순 소장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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