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순흥(順興). 자는 순중(舜仲), 호는 수파(守坡). 경상남도 의령 출신. 이조참의 안기종(安起宗)의 후손이다.
1883년(고종 20)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1884년 승문원부정자에 임명되었으나, 때마침 의복제도를 변경하는 영(令)이 내려지자, 이의 부당함을 상소한 뒤 고향으로 돌아갔다.
1887년 성균관전적으로 다시 등용되어 지평을 거쳐, 1889년 정언이 되었다. 그때 관황녀(關皇女)가 고종의 총애를 받아 진령군(眞靈君)에 봉해지는 한편, 위복(威福)을 전단(專斷)하자, 그녀를 벨 것을 상소하여 고종의 분노를 사서 제주 추자도(楸子島)에 귀양을 갔다.
그후 1894년 전라남도 임자도(荏子島)로 옮겨진 뒤 곧 귀양이 풀리고 홍문관수찬지제교 겸 경연검토관(弘文館修撰知製敎兼經筵檢討官)ㆍ춘추관기사관의 관직이 내려졌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같은 해 9월 흥해군수로 나가서 선정을 베풀어 크게 치적을 올렸다.
1895년 복제가 개정되어 검은 옷을 입으라는 영이 내려지자 사임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해 8월에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왕후폐위조칙(王后廢位詔勅)이 내려지자, 참판 이용원(李容元)·최익현(崔益鉉)과 더불어 명성황후의 복위를 건의하였고, 또한 단발령을 적극 반대하였다.
1910년 나라가 일제에 강제로 병탄당하자 산중에 들어갔고, 그해 11월 일제가 이른바 은사금(銀賜金)을 지급하려 하였으나, 이를 거부하여 창녕경찰서에 갇히기도 하였다. 그뒤에도 일제에 항거하고 또 투옥되었으나 끝내 굴복하지 않았다.
1982년 대통령표창, 1990년 애족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