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8년 6월에 양원여학교의 운영과 유지를 위한 후원단체로 양원여학교유지회가 조직되었다. 양원여학교유지회의 회장이며 양원여학교의 영어교사로 있던 윤고려(尹高麗, 또는 尹高羅라고도 함. 윤치오의 부인)와 유지부인들이 1908년 11월초에 양심여학교 발기회를 조직하고, 이어 11월 11일에 부인회의 양심여학교 발기회에서 특별총회를 열어 양심여학교 발기회의 부속학교로 양심여학교를 설치하기로 결의함에 따라 양심여학교가 설치되었다.
양심여학교는 1909년 7월의 하기방학 기간에 임시강습회를 개설하고 일반여자들에게 일어·산술·영어 등의 교과목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양심여학교는 윤고려를 교장으로 하고, 유길준(兪吉濬)·윤치오(尹致旿)를 고문으로 하였으며, 창산군(昌山君) 부인 이씨를 재무부장으로 하였다. 양심여학교는 창산군 이해창(李海昌)의 모친이자 경원군 이하전(李夏銓)의 대부인(大夫人)인 서대혜(徐大慧)의 후원으로 설립된 여학교로 서대혜는 도덕상 자선의 목적과 교육상의 발달주의로 양심여학교를 적극 후원하였다.
후에 양심여학교는 양원여학교 등과 동덕여학교에 합병되어 동덕여자대학교의 모태가 되었다. 1908년 이재극이 설립한 동덕여자의숙(同德女子義塾)이 1910년 동원여자의숙과 합병되어 1911년 3월 동덕여학교로 바뀌었고, 1915년에는 관훈동에 2층 신식 건물을 지어 학교 면모를 일신하였다. 이 무렵 동덕여학교는 양심여학교와 양원여학교를 합병하였으며, 월남 이상재를 초대 회장으로 하는 후원회를 조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