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래 고구려의 웅한이(熊閑伊)이었는데, 신라의 영토가 된 뒤에 경덕왕이 영녕으로 고쳐 중반군(重盤郡: 지금의 載寧郡)의 영현으로 하였다. 고려 현종 때풍주(豊州)에 속하였다가 뒤에 신주(信州)로 이속하였다.
1396년(태조 5)가화현(嘉禾縣)에 속하였다. 영녕이 가화와 합치게 된 뒤에 이 지역을 서가화(西嘉禾)라고도 하였는데, 구이령(仇耳嶺)을 경계로 하였다. 남대천의 지류인 어천(魚川) 유역의 넓은 평야였던 탑평(塔坪)에 자리잡고 있었다.
영녕의 옛 지명인 웅한이는 ‘지형이 크다’는 의미를 가지는데, 이 지역은 재령평야의 서남부를 차지한다. 조선시대에는 이 지역에 송화군의 남창(南倉)이 있었는데, 강을 따라 서쪽으로 나가면 장연을 거쳐 황해로 나가게 된다.
북쪽으로는 도구산(陶丘山)을 넘어 온정리를 지나 송화(松禾)에 이르는데, 이 지역은 달마산(達磨山)ㆍ용문산(龍門山) 등에 둘러싸인 분지의 지형이므로 동쪽으로 신천과 재령을 통하여 외부와 연락이 되었다. 황해도에서는 벽지에 해당되며, 봉래면 지역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