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수백세록 ()

목차
관련 정보
영수백세록
영수백세록
조선시대사
문헌
조선후기 제21대 왕 영조가 노론과 소론의 당쟁을 종식시키기 위하여 편찬한 정치서.
목차
정의
조선후기 제21대 왕 영조가 노론과 소론의 당쟁을 종식시키기 위하여 편찬한 정치서.
내용

1책. 인본.

영조는 세제(世弟) 시절에 당쟁의 참상을 경험하였다. 당쟁을 통하여 당파 세력이 강화됨에 따라 일당 전제의 경향을 띠게 되어 왕권을 약화시키는 원인이 되었음을 인식하였다. 즉위하면서 곧 붕당(朋黨)의 폐해를 통언하는 하교를 내려 당쟁의 조정에 힘썼다.

1727년(영조 3)에는 노론의 장기 집권에서 오는 폐단을 우려해 노론의 과격파를 제거하고 소론을 등용한 연립 정권을 세웠다. 1733년에는 노·소론의 영수를 불러 융화를 종용하고, 1742년에는 탕평비(蕩平碑)를 성균관 반수교(泮水橋) 위에 세워 유생들에게 왕의 뜻을 알리기도 하였다.

영조의 이러한 노력으로 전일과 같은 참화는 없어졌다. 그러나 당쟁이 완전히 종식된 것은 아니고 내면적으로 붕당싸움은 여전히 계속되었다.

또, 영조가 탕평을 표방한 것은 당시 세력이 컸던 노론으로 보면 소론을 보호하는 결과가 되는 것이었다. 이에 노론 과격파들은 “탕평으로써 하면 현사(賢邪)를 가리지 못한다.” 하여 상소로써 탕평의 불가를 논하기도 하였다.

1762년 장헌세자사건(莊獻世子事件)이 일어나 혜빈홍씨(惠嬪洪氏)의 아버지 홍봉한(洪鳳漢)과 계비김씨(繼妃金氏)의 형제 김구주(金龜柱) 사이에 대립이 생겼다.

영조의 실덕을 책하는 홍봉한 일파를 시파(時派)라 하고 영조를 동정해 세자의 실덕을 책하는 김구주 일파를 벽파(僻派)라 하여, 당시 집권당인 노론도 분열되고 소론과 남인은 대개 시파에 속해 서로 대립, 항쟁하였다.

척족 김씨일파가 세력을 잡아 1772년에는 장헌세자의 두 아들 은언군(恩彦君)·은신군(恩信君)을 삭직하고 세손(世孫)의 지위까지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렀다.

영조는 당파를 엄금함에도 불구하고 영의정 김치인(金致仁)이 당파를 조성해 조정을 탁난한다 하여 직산현(稷山縣)으로 유배하였다. 그리고 다시는 이러한 일이 없도록 조신들에게 계칙한다 하여 송장각고사(宋章閣古事)를 본받아 부사직 이해중(李海重) 이하 62인의 문신들에게 탕평을 찬양하는 글을 짓게 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모아 편집하고 책머리에 영조의 서문을 붙여 간행한 것이다.

책명을 처음에 ‘엄제방(嚴隄防)’이라 하였으나, 겸연(歉然)의 ≪엄제방≫과 이름이 같아 ≪영수백세록≫으로 고쳤다. 규장각도서에 있다.

관련 미디어 (5)
• 본 항목의 내용은 관계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