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6년 이기세(李基世)의 유일단(唯一團)이 해산되자, 문수성(文秀星)의 윤백남(尹白南), 이범구(李範龜) 등이 ‘연극계의 대발전을 도모’하고자 창단하였다.
예성좌는 이기세, 윤백남 등 동경유학파 출신 단원들로 구성되었던 극단으로, 학식이 비교적 높았다. 특히 이들은 단장 한 사람의 지휘아래 움직이는 체제에서 벗어나 문수성, 유일단에서 경험을 쌓고 재능이 많은 배우들이 극단의 업무를 나누어 맡는 등 체계화 된 운영방식을 취하였다. 예성좌는 1916년 3월 27일에 단성사에서 창립공연 「코르시카의 형제」를 시작으로, 「처」·「쌍옥루」·「카츄샤(復活)」 등을 공연하였다. 이밖의 작품으로는 「연(戀)의 말로」·「단장록(斷腸錄)」·「참회」·「충의신천리마(忠義新千里馬)」·「공명정대」·「조(潮)」·「재봉춘(再逢春)」 등이 있다.
기록에 의하면, 예성좌의 공연 중에서 「카츄샤」가 가장 큰 화제를 모았다. 「카츄샤」는 국내 극단으로 처음 상연된 작품이었는데, 카츄샤로 분장한 여형배우(女形俳優) 고수철(高秀哲)이 일본인 시마무라(島村抱月)가 작사한 ‘카츄사 노래’를 번역하여 부르고, 노래의 반주를 바이올린과 퉁소로 연주함으로써 더욱 인기를 얻게 되었다.
「카츄샤」는 일본 극단이 그 이전에 우리나라에서 공연한 적이 있었다. 1915년 11월 9일부터 용산의 사쿠라좌(櫻座)에서는 시마무라와 마쓰이(松井須磨子)가 이끄는 예술좌(藝術座)가 내한하여 「카츄샤」·「사로메」·「마구다」 등을 공연하였는데, 예성좌의 「카츄사」 공연은 일본 예술좌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신파극계의 질적인 향상을 위해 노력한 예성좌는 서양식의 근대극을 본격적으로 공부한 인물이 없었고, 시설·설비면에서도 경제적 부담이 컸으며, 관객들의 수준도 수용할만한 정도에 이르지 못하여 채 1년도 못 버티고 1916년 말에 해산하였다.
예성좌는 경영에서 예술책임까지 전부 담당하는 단장 중심체제가 아니라 공연, 경영, 기획, 연구를 분리하는 운영방식이었다. 따라서 다른 극단과 비교했을 때, 진보되고 차별화된 극단으로 당시 배우들은 더욱 연기에 전념할 수 있었다. 이러한 운영방식은 극단 근대화의 가능성을 제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