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에 북한의 조선물질문화유물조사보존위원회 고고학부에서 발굴하여 움집 5기와 6개의 구덩을 찾았다. 집자리는 대개 원형이며 바닥은 찰흙으로 다졌고 화덕〔爐址〕과 기둥구멍이 드러났다. 화덕 곁에서는 밑창을 떼어내고 거꾸로 박아놓은 큰 토기들이 출토되었다. 이 속에 녹색 염토가 굳어 있는 것은 유기물이 썩은 것으로 보인다. 즉 저장을 위한 움이었을 것이다.
광량만에 닿은 벌판의 해안을 따라 남북으로 뻗어 있는 해발 100m 미만의 구릉 가운데에는 궁산마을에 접한 2개의 언덕이 있다. 이 중 남쪽의 해발 20m의 것을 소궁산이라고 한다. 유적은 이 소궁산의 동남쪽으로 향한 경사면에 위치해 있다.
제1호 집자리는 120∼130㎝ 깊이의 둥근 형태로 지름은 5.6∼5.8m이다. 테두리 가장자리를 돌아가며 남아 있는 기둥구멍은 모두 안쪽으로 기울어져 있어 원추형 집으로 판단된다. 바닥은 단단하게 다졌다. 집자리 중앙부에는 지름 80∼90㎝의 원형에 가까운 30㎝ 깊이의 화덕이 있었고 그 둘레에는 깨진 판돌조각을 올려 놓았다.
제3호 집자리는 제1호에서 서북쪽으로 약 50m 거리에 있었다. 분명하지는 않지만 지표에서 120∼130㎝ 깊이의 풍화된 암반층에 있었고 화덕자리가 있었다. 제4호 집자리는 밑테두리 지름 5.2∼5.5m, 윗테두리 지름 약 6.2m로 불규칙하였다. 깊이는 북쪽에서 남쪽으로 가면서 점점 얕아져서 남쪽 끝은 55㎝였으나 남쪽 일부가 파괴되어 정확한 규모는 알 수 없었다.
바닥은 5㎝ 두께로 진흙으로 다졌고, 중앙부분에 지름 약 80㎝, 길이 약 20㎝ 규모의 화덕이 있었고 안은 재로 가득 차 있었다. 화덕 옆에는 토기가 거꾸로 놓여 있고 밑부분은 없어져 있었다. 이 토기 안에는 조개껍데기와 생선뼈 등이 담겨 있었고 판돌로 덮여 있었다.
제2호 집자리는 제4호 집자리가 폐기되고 난 뒤에 퇴적된 조개껍데기를 들어내고 마련된 것이다. 깊이는 약 70㎝에 이르나 파괴되어 정확한 규모는 알 수 없다. 남북 85㎝, 동서 75㎝ 규모의 화덕이 있었고 그 둘레는 진흙으로 테두리를 만들었다.
제5호 집자리는 제2호 집자리의 동남쪽 약 200m 거리에 있었다. 긴축〔長軸〕을 동북-서남선상에 두고 있는 부정형 원형이다. 중앙부의 길이 5.2m, 동북쪽 너비 2.9m, 서남쪽 너비 4m이다. 동남쪽으로 약간 치우쳐 있는 화덕은 남북 약 50㎝, 동서 약 70㎝, 중앙부 길이 약 35㎝이다.
출토유물로는 빗살무늬토기편·민무늬토기편·돌촉〔石鏃〕·돌창편〔石槍片〕·그물추〔漁網錘〕·갈돌·돌괭이〔石鋤〕·돌도끼〔石斧〕·돌대패·돌끌〔石鑿〕·숫돌〔砥石〕·뼈송곳〔骨錐〕·뼈바늘〔骨針〕 등 다수가 있다. 이 유적은 유구 및 출토유물을 통해볼 때, 우리 나라 신석기시대의 시기를 달리하는 주거지유적임이 분명하다.
이 유적은 서해안 신석기문화를 대표하며 이곳의 문화상을 ‘궁산문화’라 부른다. 1·3·4호 집자리는 궁산문화 1기로 BC 4000년기에 해당하며, 2·5호 집자리는 궁산문화 3기로서 BC 3000년기 중반으로 편년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