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본의 현존 여부는 미상이고 원륜의 서문만 후대에 간행된 족보에 실려 전한다. 서문에 따르면, 원주원씨는 1546년에 초간본인 병오보(丙午譜)가 작성되어 이 족보가 편찬되던 17세기 중반까지 남아 있었다고 한다.
원륜은 우연히 족친으로부터 병오보를 입수하면서 족보 편찬을 기획하게 되었다. 이에 병오보를 저본으로 하여 각 파의 지손들이 소장하고 있던 초보를 참고하여 무려 3번의 교정작업 끝에 초안을 완성하여 간행에 이른 것이다. 병오보 간행 이후 정확히 120년 만에 간행되어 이 또한 병오보라 불린다.
편찬자 원륜은 원천석(元天錫)의 10세손이며, 관찰사 원황(元鎤)의 손자이다. 1652년(효종 3)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1636년 남한산성에서 인조를 호종한 공으로 원종공신에 책훈되었다. “한양(漢陽)의 남곡헌(南谷軒)에서 삼가 서문을 쓰다.”라는 기록으로 보아 이 족보는 서울에서 간행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원본이 없어 체제와 내용을 자세하게 알 수는 없지만, 이 시기 다른 족보와 마찬가지로 형태적으로는 서문, 범례, 보도, 발문 등 체제가 비교적 완비되고, 내용적으로는 내외손 모두가 수록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기록상 이 족보는 원주원씨족보의 재간본으로서 1767년(영조 43)의 정해보(丁亥譜), 1825년(순조 25)의 을해보(乙亥譜), 1872년(고종 9)의 임신보(壬申譜) 등 후간된 원주원씨족보의 지침이 되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