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 소장. 1994년 경기도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수양관은 황해도 감영의 본청인 선화당(宣化堂)의 별칭이었다. 이 그림을 제작하던 당시 윤두수는 황해감영 해주에서 가까운 황해도 연안부사(延安府使)였다.
그림 상단의 전서체(篆書體)로 쓴 제명은 글씨로 이름이 높았던 동생 윤근수(尹根壽, 1537∼1616)의 글씨이다. 그림 상단 우측에는 56자의 칠언시(七言詩)를 썼으며, 끝에 제작 일자와 ‘오음(梧陰)’의 인장을 찍었다.
황해도관찰사영인 수양관(首陽館)의 전경과 관찰사 행사 때의 행렬 의식 등이 채색으로 묘사되어 있다. 그림의 밑에는 당시 배행(陪行)했던 영리(營吏) 24인의 이름, 관직, 본관 등을 기록하였다.
향리 명단 아래에는 1737년(영조 13) 윤두수의 6대손 윤득화(尹得和, 1688∼1759)가 이 그림을 보고 쓴 기록이 있다. 이 기록은 윤득화가 황해도관찰사로 부임하여 전란을 겪으면서도 보존되어 있던 이 그림과 글씨를 보고 감흥을 일으켜 그림의 유래 등을 설명한 것이다.
선조의 예에 따라 자신을 배행(陪行)했던 영리(營吏) 29인의 이름과 관직을 기록하였으며, 선조(宣祖)대에 이름이 기록된 영리의 후손들 이름 밑에는 누구의 6대손임을 기록하여 역사가 끊어지지 않고 이어짐을 밝혔다.
또, 1759년에 6대손 윤득양과 1803년(순조 3)에 8대손 윤정렬, 그리고 1814년에 8대손 윤욱렬이 역대 선조의 그림과 글씨를 보았음을 적어 놓은 기록도 남아 있다.
조선 전기의 작품이 드물기 때문에 역사적 가치가 높으며, 이 그림을 통해 16세기 후반의 해주에 있던 황해도관찰사영의 경관과 관찰사 부임 행렬의 전모를 볼 수 있다. 또한, 산의 묘사에 단선점준(短線點皴)이 사용되어 조선 전기에 유행했던 안견(安堅) 화풍의 영향도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