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1년 강원도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벼루는 이이가 쓰던 벼루로 그간 단계석(端溪石)으로 알려졌으나 1973년 창덕궁(昌德宮)에서 열렸던 명연전(名硯展)에서 고산석(高山石)이라고 감정된 바 있다. 크기는 가로 9.1㎝, 세로 16.1㎝, 두께 0.8㎝이며, 연면(硯面)은 타원형으로 아래 위에 매화가지를 양각하였다. 벼루 뒷면에는 ‘함무지상공석 보궐시용귀동 운발묵문재자(涵婺池象孔石普厥施用歸洞雲潑墨文在玆)’라는 명문(銘文)이 있는데, 이는 1788년(정조 12)정조가 율곡의 유품이 강릉에 있다는 말을 듣고 가져오라 하여 친람(親覽)하고 어제어필(御製御筆)한 것을 각자한 것이다. 친람 후 반환할 때 어제각(御製閣)을 지어 소중히 보관하게 하였다.
토지양여서는 이이가 그의 소유토지를 이종제(姨從弟) 권처균(權處均)에게 양여한다는 증서로, 오늘날 양도계약서와 같은 성격의 문서이다. 1579년(선조 12) 벼슬을 버리고 해주(海州) 석담(石潭)에 은거하고 있을 때 친필로 작성한 것으로 ‘절충장군첨지중추부사’라는 직함을 쓰고 수결을 하였다. 조카 이경진(李景震)과 외조카 조린(趙 )을 증인으로 세웠다. 이 자료는 당시 토지양여에 대한 절차 및 내용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이다. 강원도 강릉시 죽헌동 권민구(權敏求)가 소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