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주(儀注)라고도 한다. 조선왕조에서는 1443년(세종 25)에 의주상정관(儀註詳定官)을 두어 왕실에서 거행하는 각종 의식의 진행 절차를 제정하게 했고, 특별한 행사가 있을 때마다 그에 합당한 의전절차를 마련해 이에 따라 거행하였다.
왕실의 예식은 대체로 『국조오례의』·『속오례의』·『상례보편(喪禮補編)』 등을 참고해 진찬하였다. 특히, 임금·세자 등의 혼인 및 장례와 세자·왕후 등의 책봉 행사를 비롯해 그 밖에 건물의 축조, 공신책봉, 궁실의 개조, 선왕에 대한 추호 행사(追號行事), 실록 편찬 등을 포함한 왕실 및 국가적 행사에는 특별히 도감이나 실록청을 설치해 운영하였다.
또한 행사가 끝난 뒤에는 다시 의궤청(儀軌廳)을 설치해 그 일의 논의 과정에서부터 행사 후에 유공자에 대한 포상에 이르기까지 관계된 전교(傳敎)·계사(啓辭), 해당 관청 사이에 오간 문첩(文牒), 소요된 경비와 인원 따위를 빠짐없이 기록해 의궤를 편집, 후세에 참고하도록 하였다.
이를테면, 『가례도감의궤(嘉禮都監儀軌)』·『대례의궤(大禮儀軌)』·『국장도감의궤(國葬都監儀軌)』·『예장도감의궤(禮葬都監儀軌)』·『추숭도감의궤(追崇都監儀軌)』·『찬수청의궤(纂修廳儀軌)』·『천릉도감의궤(遷陵都監儀軌)』·『추쇄도감의궤(推刷都監儀軌)』·『친경의궤(親耕儀軌)』·『친잠의궤(親蠶儀軌)』·『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 등을 포함해 행사의 성격에 따라 다른 여러 가지의 의궤가 현재 규장각도서 등에 다수 소장되어 전해진다.
그러나 영조·정조 때까지만 해도 임금이나 왕후가 농잠(農蠶)의 중요성을 실감하기 위해 행했던 친경례(親耕禮)·친잠례(親蠶禮) 등을 거행한 뒤에도 의궤를 편집할 만큼 각종 행사를 치르는 데 비교적 성대하게 준비, 거행하였다.
조선 말기에 들어오면서 왕실의 각종 행사를 간소화함에 따라 이 의궤의 편집도 현저히 줄어든 반면에, 이때부터는 일정한 기간 동안 왕실에서 행한 여러 가지 의식의 시행시기·명칭·준비 과정 등을 한꺼번에 기록한 『의주등록(儀註謄錄)』의 편집이 눈에 띄게 증가하였다.
그러면서도 1897년 10월에 고종이 우리 나라 역사상 처음으로 대한제국의 황제로 존칭되는 의식의 거행에는 『고종대례의궤(高宗大禮儀軌)』를 편집하는 등 의식의 규모가 웅장할 때에는 이처럼 의궤의 편집도 지속적으로 시행되었다.
그러나 이 의궤의 편집이 꼭 도감이나 의궤청을 통해서만 이루어졌던 것은 아닌 듯하다. 예를 들면, 현재 국립중앙도서관·규장각·장서각 등에는 여러 종류의 『의주(儀註)』·『의주(儀注)』·『의주등록』 등이 내용이나 분량에서 매우 다양하게 전해지고 있다.
이를 종합해 보면 왕실에서 행하는 여러 가지 예식의 거행에 앞서서 주로 의식의 진행 순서에 대해 담당 관청에서 앞에서 말한 주요 참고 서적들을 토대로 마련한 것을 일정한 기간별로 묶어 편집한 경우도 있고, 의식을 거행한 뒤에 거행 시기·참가 인원 등을 함께 기록한 뒤 일정한 기간별로 편집한 경우도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1894년(고종 31) 직제개편 이후로는 그동안 예조 및 병조에서 관장해오던 황실의 의전 업무를 신설된 궁내부(宮內府)에서 대신하게 됨에 따라 이전까지만 해도 왕실의 행차에 배종(陪從)하는 관청별로 각각 의주를 마련해 왔으나, 이때부터는 호위(護衛)·승여(乘輿)를 포함한 제반 준비업무를 궁내부에서만 준비해 행사에 참여하게 되는 부서에 통보하게 되었다.
또한 직제 개편 이전에는 임금의 행행(行幸)이나 조령(朝令) 때의 의장 및 대열을 일컫는 노부(鹵簿)와 그 밖에 구목(廐牧)·정역(程驛) 등의 업무를 병조에 소속된 승여사(乘輿司)에서 맡았다.
그러나 1908년에 궁내부 소속 관청인 장례원(掌禮院)에서 그 전해부터 그 해에 이르기까지 2년 동안 왕실에서 거행된 의식에 관해 편집한 『의주』를 살펴보면, 권두에 노부에 관한 사항까지 장례원에서 마련해 수록하고 있다.
그러나 그 전에는 대가식(大駕式)·법가식(法駕式)·소가식(小駕式) 등의 명칭으로 구분해 임금이 거둥하게 되는 성격과 취지에 따라 호위대의 숫자를 포함한 의장의 규모를 말하는 노부식을 구분했으나, 이때부터는 노부제일공식(鹵簿第一公式)·노부제이공식(鹵簿第二公式)으로 명칭을 바꾸었으며, 기타 노부식을 따르지 않는 간단한 외출을 포함한 행행의 성격과 취지에 따라 임금 및 세자·왕후 등 수행하는 신하들의 복장을 차등 있게 규정하고 있다.
권1에 「친경의」·「친례의」·「사직서고의(社稷誓告儀)」를 포함한 40여회의 의식에 대한 의주와, 권2에 순종이 홍릉(洪陵)·유릉(裕陵)에 친향(親享)할 때, 그리고 종묘의 제사에 쓰일 희생(犧牲) 및 제기(祭器)의 이상 유무를 확인하는 행사를 포함한 30여 차례의 의식에 앞서 마련한 의주 등이 실려 있다.
특히, 한말에 구미 제도를 참작해 새로 제정한 신식예복으로 복장이 바뀌고, 이전까지는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임금의 거동에 의장을 갖춘 행렬의 총지휘를 병조판서가 맡았지만, 그 이후로는 궁내부대신이 대신하는 한편, 의주의 본문 이외에는 국한문 혼용체로 되어 있다.
한편, 조선왕조 때의 이와 같은 제도의 운영이나 시대적 변천 내용을 보다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앞서 소개한 것들 이외에도 『친행열무의(親行閱武儀)』·『대열의주(大閱儀注)』·『대사례의궤(大射禮儀軌)』·『악기조성청의궤(樂器造成廳儀軌)』·『녹훈도감의궤(錄勳都監儀軌)』·『산릉도감의궤(山陵都監儀軌)』·『세손책봉의편람(世孫冊封儀便覽)』·『진찬의궤(進饌儀軌)』·『책례도감의궤(冊禮都監儀軌)』·『경모궁의궤(景慕宮儀軌)』·『사직서의궤(社稷署儀軌)』·『노부식(鹵簿式)』·『조선영접도감도청의궤(朝鮮迎接都監都廳儀軌)』(이상 규장각 소장), 『궁정예의범(宮庭禮儀範)』(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의장반차도(儀仗班次圖)』(장서각 소장) 등을 포함한 관계문헌 들을 종합, 분석해야 한다.
의주에 관한 가장 직접적인 자료는 앞서 말한 규장각 소장의 『의주』·『대열의주』·『삼반례식(三班禮式)』, 장서각 소장의 『의주』·『의주등록』·『의주등록속』·『의주등록목록』 등이 있다.
그 밖에 국립중앙도서관 소장의 『예장청등록(禮葬廳謄錄)』·『친림경무대대종회의(親臨景武臺大宗會儀)』·『조선궁중제의절(朝鮮宮中諸儀節)』·『묘제의(墓祭儀)』·『각전궁동가의절(各殿宮動駕儀節)』·『의절유초(儀節類抄)』·『영흥본궁의식(永興本宮儀式)』 등 왕실의 예식으로부터 사가(私家)의 제사에 이르기까지 실로 다양한 행사를 대상으로 마련한 의주들이 전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