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2년 부산광역시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임진왜란 때 수영성전투에서 순절한 수군과 성민 25명을 모신 곳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상좌수사 박홍(朴泓)은 목숨을 유지하기 위하여 성을 버리고 도망갔다.
이 때 경상좌수영의 수군 · 성민 25명은 죽기를 맹세하고 유격전으로 대항하였다. 이들 25명의 사적이 드러난 것은 1609년(광해군 1) 동래부사 이안눌(李安訥)이 지방민의 청원에 따라 25명의 사적을 채록하여 정록(旌錄 : 공을 표창하여 기록함.)에 싣고, 그 집에 ‘義勇’ 두 자를 써 붙여 25명의 충의를 선양한 데서 비롯되었다.
그 뒤 순조 때 동래부사 오한원(吳翰源)은 그들 후손에게 역의 의무를 면제시켜 주고 포상하였다. 1853년(철종 4)에는 경상좌수사 장인식(張寅植)이 지금의 수영공원 안에 이들의 사적을 기리는 비를 세우고 의용단이라 이름하고 봄 · 가을 제사를 지냈다.
이러한 의용단의 사적은 장인식이 글을 짓고, 전 승지 이형하(李享夏)가 글을 쓴〈수영의용단비명 水營義勇壇碑銘〉에 잘 나타나 있다. 일제강점기 때는 수영기로회(水營耆老會)가 제사를 주관하였다.
1974년 9월∼12월부산시에서 대규모 정화공사를 하여, 비석단 3개와 의용제인비(義勇諸人碑) 제25기를 건립하고, 내삼문 1동을 세우고 한식으로 담장공사를 하였다. 지금은 수영고적민속보존회에서 맡아 관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