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래 신라의 사동화현(斯同火縣)이었는데 뒤에 수동(壽同)으로 고쳤다가, 757년(경덕왕 16) 인동이라 고쳐 강주(康州) 소관의 성산군(星山郡: 지금의 성주군) 영현으로 하였다. 1018년(현종 9) 경산부(京山府: 지금의 성주군)의 임내로 하였다가, 1390년(공양왕 2) 처음으로 감무(監務)를 설치하면서 약목현(若木縣)을 편입시켰다.
1604년(선조 37) 도호부로 승격되었고, 선조 때 곽재우(郭再祐)가 축조했다는 천생산성(天生山城)의 조방장을 도호부사가 겸임하였다. 1895년(고종 32) 대구부 소관의 인동군이 되었고, 다음해에 경상북도의 군이 되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칠곡군에 편입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선산과 칠곡 사이의 작은 현에 불과하던 인동이 도호부라는 높은 품계를 받은 것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 곽재우가 왜적을 크게 무찔렀기 때문이다. 지형상 금오산에서 뻗은 산줄기가 건대산(件代山)ㆍ옥산(玉山)ㆍ천생산(天生山)ㆍ유악산(流嶽山)ㆍ황학산(黃鶴山) 등에 이어지면서 인동 전체를 감싸고 있으며, 인동의 중앙부를 낙동강이 관류하고 있었다.
당시에는 건대산과 박집산(朴執山)에 봉수가 있어 성주와 상주 지역을 연결하였다. 보발로 양원참(楊原站)이 있었고, 양원역과 동안역(東安驛)을 통하여 대구ㆍ군위ㆍ개령 등지와 연결되었다.
강변에는 인풍루(仁風樓)ㆍ망호루(望湖樓) 등의 누정이 있었고, 중지창(中旨倉)은 인동의 세곡을 모아 낙동강 하류로 실어 날랐다. 지금의 인동동 지역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