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책. 필사본. 그 해 8월부터 11월까지(윤8월 포함) 5개월 간의 이 기록은 개인적인 기록은 아니며 그렇다고 정식 사행기록도 아니다.
사신으로 가던 전해에 황신은 심유경의 접반관(接伴官)으로 있었다. 조선 조정에서는 왜영(倭營)에 들어가 적정(賊情)을 살피도록 요구했는데, 심유경은 조선의 통신사와 같이 갈 것을 주장하였다.
다음 해 심유경의 조선사신 동행 주장이 여러 번 번복된 끝에, 같이 가되 사신이라는 명칭은 붙이지 말고 단지 두 사람만 가려 보내며 명칭을 근수사(跟隨使)라 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이 주장도 번복되어 국서(國書)와 예폐(禮幣)를 마련, 별도로 가고 통신사라 칭하기로 하였다. 당시 사행은 모두 309인이었다. 이 일기에 나타난 사행에 대한 도요토미(豊臣秀吉)의 거만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는 거짓으로 다리가 아프다며 구부리지도 않고 인사하였다.
또 갑자기 화를 내며 “우리가 조선의 두 왕자를 놓아 보냈으니 마땅히 두 왕자를 보내어 회사해야 하는데 벼슬이 낮은 사신을 보낸 것은 우리를 홀대한 것이다. 명나라는 은전을 베풀었으니 감사하지만 조선에는 군사를 더 파송해야겠다.”고 하였다.
또 조선의 사행을 거절하는 이유는, 첫째 두 왕자의 회사가 아직까지 없다는 점, 둘째 이번 사행의 사신 벼슬이 낮다는 점, 셋째 작은 조선이 아직까지 일본을 멸시해 세공도 바치지 않고 조빙(朝聘)도 하지 않았다는 점, 넷째 책봉조사(冊封詔使)가 도망한 것은 조선의 위약이라는 점 등이라고 하였다.
마침내 억류시켜 살해한다는 말이 퍼지자, 명나라의 두 책봉사는 환국을 종용하였다. 즉, 만약 조선의 국서를 찢었다면 여기서 죽는 것이 옳지만, 받지 않은 것은 사행의 책임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더욱이 명나라 책봉사는 조서는 전했으나 책봉은 마치지도 못하였다.
이처럼 황신이 사행의 일을 마치지 못하고 돌아오자 대간은 그를 탄핵하였다. 그러나 선조는 홀로 많은 수고를 하였다며 상을 내렸다. 만일 이번 사행의 일을 성공시켰다면 상이 없었을 것이라고 한 것으로 보아, 강화의 실패를 오히려 다행으로 여긴 듯하다.
일기 마지막에는 일본의 지리·관제·풍속 등에 대한 짤막한 글이 붙어 있다. 이 책은 임진왜란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