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성 영천리 고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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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정보
장성 영천리 고분 정면
장성 영천리 고분 정면
선사문화
유적
국가유산
전라남도 장성군 장성읍에 있는 삼국시대 백제의 굴식돌방무덤. 횡혈식석실분.
이칭
이칭
말뫼, 말무덤, 장성영천리석실분
시도문화유산
지정 명칭
장성 영천리 고분(長城 鈴泉里 古墳)
분류
유적건조물/무덤/무덤/봉토묘
지정기관
전라남도
종목
전라남도 문화유산자료(2001년 09월 27일 지정)
소재지
전남 장성군 장성읍 보해길 41 (영천리)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목차
정의
전라남도 장성군 장성읍에 있는 삼국시대 백제의 굴식돌방무덤. 횡혈식석실분.
내용

2001년 9월 27일에 문화재자료(현, 문화유산자료)로 지정되었다. ‘말뫼(말무덤)’라고도 부른다. 1985년에 보해양조(주) 공장이 이곳에 들어서면서 조사되었다. 이 고분은 노령산맥 남쪽 지맥의 낮은 구릉상에 입지하고 있으며, 구릉의 서쪽과 북쪽에는 평지가 발달하여 있고 북에서 남으로 영산강의 지류인 황룡강(黃龍江)이 흐르고 있으며 동남쪽으로는 높은 산지가 자리하고 있다. 현재 공장 정문 우측에 복원되어 있다.

여기에서는 원형의 봉토를 가진 고총(高塚) 1기가 조사되었는데, 동서로 뻗은 구릉 정상부를 편평하게 정지하고 직경 13∼14m 범위에 잔자갈을 깐 다음 그 위에 석실을 구축하면서 봉토를 동시에 쌓아 올린 지상식(地上式)구조를 하고 있다. 봉분은 직경 17m에 높이가 3m(석실바닥에서부터는 2.5m)정도이며, 돌방[石室] 장축은 동-서 방향 구릉과 직교하도록 되어 있고 남쪽에 널길[羨道]이 달려 있는 굴식돌방[橫穴式石室]이다.

돌방은 길이 2.8∼2.9m, 너비 2.2∼2.4m, 높이 1.7∼2.0m로 약간 장방형(長方形)의 평면을 하고 있으며, 남쪽 벽의 가운데 거의 전체를 이용하여 입구가 만들어져 있다. 입구부에는 판석으로된 널길 벽석 안쪽에 4각으로 다듬은 문주석(門柱石)을 양쪽에 각기 2매씩 세워 길이 1.1m, 너비 0.25m, 높이가 0.3m의 1매로 된 널길 뚜껑돌을 받치고 있다. 문주석 사이에는 길이 1.1m, 최대너비 0.25m, 높이 0.3m의 문지방석(門地枋石)이 있고, 깬돌[割石]과 점토를 이용하여 입구를 폐쇄하였다. 석실은 길이 40∼60㎝, 두께 10∼15㎝ 크기의 깬돌을 아래부터 눕혀쌓기[平積]하여 20(서벽)∼23(동벽)단 정도 쌓아 올렸는데, 네 벽 모두 1/2 높이까지는 수직으로 쌓다가 그 위부터는 안으로 내경(內頃)하도록 좁혀 맞조임식으로 쌓은 다음 길이 1.95m, 너비 0.95m, 높이 0.3m 크기의 장대판석 2매를 사용하여 천장을 덮었다.

널길은 길이 3.2m, 너비 1.3∼1.6m, 높이 1.7∼2.0m의 크기에 입구 쪽이 약간 좁게 되어 있으며, 널길 양쪽 벽은 돌방과 달리 제일 아랫단에 부분적으로 넓은 판석을 세우고 동벽은 6∼12단, 서벽은 4∼17단 정도로 깬돌을 눕혀 쌓았다. 벽은 입구 쪽으로 갈수록 낮아지며, 연도 입구 바닥에는 깬돌 3매를 놓아 마무리하였다.

바닥은 돌방과 널길 모두 묘역을 조성하기 위하여 깐 잔자갈층 위에 점토를 다졌으며, 별도의 배수시설이나 널받침[棺臺] 등은 사용하지 않았다. 한편 연도 벽석이 2차례에 걸쳐 축조되어 있고, 문주석 중 1매가 문지방석과 널길 폐쇄석 사이에 끼여 있는 점으로 보아 재차 시신을 안치했을 가능성이 높다.

유물은 대부분 도굴로 교란되었지만 석실 북쪽의 서벽 가까이에서 금제귀걸이[金製耳飾] 1쌍이 출토되었으며, 돌방 폐쇄석 사이에서 출토된 접시[杯] 1점과 그릇받침[器臺]편들은 입구를 폐쇄하면서 제의(祭儀)를 위하여 매납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밖에 수습된 유물로는 뚜껑접시[蓋杯] 약 8개체분과 함께 단추형 꼭지 등이 있는 뚜껑 2점, 항아리[壺]의 구연 및 동체옥류가 있다.

이 고분의 축조연대에 대해 발굴보고자는 6세기 후반으로 추정하였으나, 바닥이 약간 편평하고 배신(杯身)이 다소 깊은 뚜껑접시의 형태가 공주(公州) 정지산(艇止山) 유적에서 출토된 것들과 비교되며, 주로 편평한 깬돌을 이용하여 돌방을 구축한 점 등으로 보아 늦어도 백제 웅진기(475∼538년)인 6세기 전반에 축조된 것으로 생각된다.

백제의 돌방무덤이 일반적으로 지하 또는 반지하식의 구조에 수십 기가 군집을 이루고 있는 것과 달리 영천리 돌방무덤은 분구(墳丘) 중에 지상식의 돌방을 만들고 집단묘를 이루고 있지 않은 점에서 차이가 있으며, 전남 지역에서 이와 유사한 돌방의 예로는 해남(海南) 월송리(月松里) 조산(造山) 고분이 있다. 영천리 돌방무덤은 영산강유역의 분구분 전통을 일부 잇고 있지만, 시기적으로 보아 백제 돌방무덤의 영향을 받아 축조된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므로 이 고분은 백제의 중앙에 편입된 지방 유력 수장의 무덤으로서, 영산강유역의 재지세력이 백제의 지방으로 편제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주요한 자료 중 하나로 평가된다. 한편 사점열문(斜點列文)이 시문되어 있는 단추형 꼭지의 뚜껑은 서부 경남에 기원을 둔 가야계로 생각되어, 영천리 돌방무덤 축조 집단과 가야 지역과의 교류관계를 보여주고 있다.

참고문헌

『한국고고학사전』(국립문화재연구소, 2002)
『장성영천리횡혈식석실분』(이영문, 전남대학교박물관·장성군, 1990)
「고분조사보고」(이영문, 『향토문화유적조사』2, 향토문화개발협의회,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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