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현, 국가유산) 지정 당시 황후가 착용하여 전해지는 것이라 하여 “전(傳) 황후 황원삼”으로 명명된 유물로서 금사로 수놓은 오조룡보가 부착되어 있다. 이 유물은 윤황후가 세종대학교(전 수도여자사범대학) 설립자에게 기증한 유물 가운데 한 점으로 윤황후가 직접 착용하였던 원삼이라 한다. 기증된 황원삼에는 ‘긔미신조 황직금 원삼’이라 명명되어 있다. 기미년은 1919년으로 영친왕의 가례가 예정되어 있던 시기임을 고려할 때 혼례를 위하여 준비했었을 가능성이 높다.
황원삼은 대한제국 시기 황제의 황색 곤룡포의 경우와 같이 황후용 상복(常服)에 해당한다. 반면『대한예전(大韓禮典)』권5 관복도설과 구황실 자료「예복(禮服)」에는 원삼이 비빈(妃嬪)의 소례복으로 기록되어 있다. 수복문자와 화문이 제직된 황색 비단에 어깨와 소매, 길에 부분적으로 동일한 문양이 금사로 제직되어 있으며 안감은 홍색 화문으로 만들어진 겹옷이다. 전형적인 20세기 초반 원삼의 조형적 특징을 보이고 있다. 윤황후가 노년에 안경을 쓰고 원삼 차림으로 찍은 흑백 사진에서 동일한 문양이 선명하게 확인된다. 1979년 국가민속문화재로 지정되었으며, 현재 세종대학교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 유물의 겉감은 황색의 문자화문단(文字花紋緞)으로 백수(百壽), 백복(百福) 등 길상무늬가 짜여져 있으며 어깨에서 소매 상단에 16.5㎝, 하단에 20㎝, 뒷길 중앙과 앞뒤길 무릎 부분에 20㎝ 너비로 동일한 무늬가 직금(織金)되어 있는 통수스란[通袖膝襴]형식으로 화려하게 직금 장식되어 있다. 소매 끝에는 홍색과 청색의 두 줄 색동이 달리고 연이어 한삼이 홑으로 부착되어 있는데 이 또한 직금단이다. 안감은 홍색의 호로문단(葫盧紋緞)으로 만들었다. 치수는 뒷길이 145㎝, 앞길이가 130㎝인 전단후장(前短後長)형이며 진동선 아래로 3.0㎝ 내려온 지점부터 양옆이 트여 있다. 옆선 도련이 완만한 일자형이다. 화장 136㎝, 소매나비 70㎝ 고대 16㎝, 깃나비 3.8㎝이다. 깃은 배자깃 형태이며 안깃은 목판깃 형태로 백색 동정이 안깃에 달려 있다. 안감의 소매는 겉감의 색동선 부분까지만 연결되어 있고 끝부분에 남색 비단선을 둘러 주어 마감하였기 때문에 한삼은 홑으로 되어 있다. 이 유물은 깃에서 겉깃과 안깃만 분리되어 있을 뿐 나머지는 모두 함께 바느질 된 전형적인 겹옷형태로 도련에 둘러진 남색 가선(加線)도 안감의 도련에만 달려 있다. 이밖에도 소매배래 부분이 4겹으로 바느질 되어 있는 점 등 간소화된 왕실의 바느질 기법의 변화를 확인시켜 준다.
양어깨와 앞, 뒤면에 황색바탕에 용을 수놓은 지름 18㎝의 오조룡보(五爪龍補)를 부착하였다. 중앙의 금사 용문(龍紋)을 중심으로 오색의 견사를 이용하여 바위 · 산 · 물결 · 구름 등을 수놓았으며, 원형의 테두리는 다소 굵은 금사를 두 줄로 돌려주어 징금수로 마무리하였다.
순정효황후(純正孝皇后)로 책봉된 윤황후의 기증품임을 감안할 때 이 유물은 유일하게 남아 있는 황후용 황원삼이다. 광무 원년(1897) 제정된 황실의 장복제도에서『대명회전』에 근거하였으나 황후나 비빈의 상복(常服)제도는 제외되어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상궁들이 작성하여 남아 있는 실질적인 자료「궁중발긔」에서 유일하게 확인된다. 명성황후는 붕어(崩御) 이후에 황후로 책봉되어 황후 신분에서 국장이 치러졌다. 이후 ‘경효전(景孝殿)마마’라 호칭되었으며 고종과 순종 재위 시 10여년 간 예법대로 제례를 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