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5년 ‘을사5조약’이 체결된 이후 일제의 침략이 본격화되자 의병항쟁에 나섰다. 1907년 9월 이인영 의병장이 원주에서 봉기하자 선봉장으로 활동하였다.
1907년 9월 경 부하 한원태(韓元泰)·우상옥(禹相玉)·정시항(鄭時恒) 등과 함께 700여 명의 의병을 인솔하여 독자적으로 문경(聞慶)·청풍(淸風)·여주(驪州)·원주(原州)·지평(砥平) 등지를 이동하며 활동하였다.
10월 경에는 충주군 과현(果峴), 충주군 목계(木溪), 토산군(兎山郡) 황곡(黃谷), 음성군(陰城郡) 사양(射楊), 괴산(槐山) 칠성암(七星岩), 지평 삼산동(三山洞) 등지에서 일본군과 격전을 벌였다.
이후 일본군의 공세로 전세가 어려워지자 원주로 퇴진하여 정락인(鄭樂寅)·방인관(方仁觀)·원용진(元容振) 등과 합세하였다. 1907년 말 이인영·허위 등이 중심이 되어 전국에 흩어져 있는 의병부대를 경기도 양주에 집결시킬 때, 의병 100여 명을 거느리고 합류하여 관북(關北)의병대장에 임명되었다.
십삼도창의대진소 연합 의병부대는 서울로 진격하던 중 일본군의 공격을 받아 후퇴하였다. 정봉준도 이때 퇴각하였는데 이후 행적은 확인되지 않는다.
정봉준의 휘하에서 활동하였던 한원태·우상옥·정시항 등은 이후 일본군에게 붙잡혀 각각 유형(流刑) 15년, 종신형, 유형 15년 등의 중형을 언도받았다.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