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명은 정영택(鄭英澤). 충청북도 충주 출신.
1929년 충주공립보통학교(현 교현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서울 중앙고등보통학교(中央高等普通學校)에 입학하였다. 중앙고등보통학교 재학시 좌경서적을 읽다가 발각되어 정학처분을 몇 차례 당하고는 결국 학업을 중단하고 말았다.
1935년 서울로 다시 올라와 조선문학사를 열어 문예지 『조선문학』을 지봉문(池奉文)·이무영(李無影) 등과 함께 간행하였다. 사회주의 사상에 기울어져 8·15광복 직후, 남로당에 입당하였고, 남북협상차 북행하는 김구(金九)를 따라 북한에 갔다가 청주교도소에 1년간 수감되기도 하였다.
출감 이후, 줄곧 도피생활을 하다가 한국전쟁을 맞게 되었다. 그때 그는 고향인 충주에서 예술동맹위원장을 맡아 좌경활동을 하다가 월북하였다.
그의 시작활동은 1939년 조선문학사에서 간행된 시집 『모밀꽃』 이전까지 3∼4년으로 국한되며, 시집 수록분을 포함하여 40편 가까운 시작품을 지상에 발표하였다. 그의 시 대부분이 향토적 정서를 노래하고 있는데, 이는 그가 고향에서 보낸 성장기의 체험과 연관된다.
그의 이런 체험이 좌익성향과 결부되어 피폐한 농촌의 현실을 고발하는 시작태도를 보인다. 그러나 향토적 정서를 바탕으로 하고 있으면서도 이념성의 원리가 훨씬 강하게 작용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