즉, 종교와 정치적 권력이 분리되지 않고 한 사람에 의해 집중된 정치체제가 제정일치사회인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세속적인 권력에 만족하는 정치지배자들과 종교전문가인 제사장들이 나누어지는데, 점차 힘과 권력은 세속적인 정치지배자나 왕에게 귀속되면서 종교도 그 밑에 예속된다.
우리나라는 처음에는 종교가 제정일치(theocracy)의 형태를 지니고 있었다고 생각되지만 점차 제정(祭政)의 분리가 이루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시기는 별읍(別邑)이나 종교전문가인 천군(天君)이 등장하는 삼한사회부터라 볼 수 있다.
당시에는 세속적인 권력의 대표자인 군장(君長)과 직업적인 종교전문가인 천군(天君)이 별도로 존재하였다. 그리고 서구의 정치진화론으로 보면 고대국가 출현 이전의 군장 또는 족장(chiefdom)사회단계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의 정치적·사회적 상황은 중국 기록인 『후한서』 동이전과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잘 나타나 있다. 『후한서』 동이전 한조에는 “여러 국읍(國邑)에서는 각각 한 사람이 천신(天神)의 제사를 주재하는데 이를 천군이라 부른다. 또 소도(蘇塗)를 만들어 그곳에 큰 나무를 세우고 방울과 북을 매달아 놓고 귀신을 섬긴다.”라는 기록이 보인다.
그리고 『삼국지』 동이전 한조에도 “귀신을 믿기 때문에 국읍에 각각 한 사람씩을 세워서 천신의 제사를 주관하게 하는데 이를 천군이라 부른다.”, “여러 나라에 각각 별읍이 있으니 이를 소도라 한다. 큰 나무를 세우고 방울과 북을 매달아 놓고 귀신을 섬긴다. 그 지역으로 도망온 사람은 누구든 돌려보내지 아니하므로 도둑질하는 것을 좋아하게 되었다. 그들이 소도를 세운 뜻은 부도(浮屠)와 같으나 행하는 바의 좋고 나쁜 점은 다르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기록들을 통해 볼 때 농경문화를 배경으로 동제(洞祭)에서 발전한 소도신앙은 별읍의 형성과 더불어 등장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직업적인 종교전문가이며 제사장인 천군은 국읍에서 선임된 것으로 이해된다. 다시 말해 이 시기에는 이미 제정일치단계에서 벗어난 것으로 여겨진다.
또 천군이 주관하고 있는 별읍은 신성불가침의 영역으로 서양의 도피소(asylum)를 연상하게 한다. 그리고 별읍의 소도라는 명칭은 입목(立木)·간목(竿木) 등을 나타내는 소대 또는 솟대 등을 의미하는 데서 연유된 것으로 여겨지는데, 이는 농경문청동기와 같은 고고학자료와 솟대 등의 민속학자료로 입증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