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경일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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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사
문헌
조선시대 문신 · 학자 김육이 명나라에 다녀온 후에 작성한 견문록. 사행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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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시대 문신 · 학자 김육이 명나라에 다녀온 후에 작성한 견문록. 사행록.
내용

1권 1책. 영인본. 이 책은 저자가 동지사(冬至使) 서장관(書狀官) 이만영(李晩榮)을 따라 1636년(인조 14) 6월 15일 해로(海路)로 출발해 등주(登州)를 거쳐 명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6월 2일 귀환할 때까지 1년간의 일기이다.

이 사행은 다른 사행에 비해 체류기간이 길었다. 그것은 이 사행이 명나라에 가는 마지막 사행이었고 사행 도중 병자호란이 일어나서 잠시 귀국을 늦추었기 때문이었다. 사행 목적은 자세한 기록이 보이지 않으나 군사적 목적이 큰 것이었으리라 여겨진다.

그것은 명나라에 대해 유황(硫黃)의 구매를 적극적으로 추진한 점과 이 때 벌써 청군의 공격을 예상해 조공로의 변경을 요구했던 때문이다. 일기는 비교적 빠진 날이 많고 간략하게 되었다.

그 내용을 전체적으로 보면 명나라의 국정(國情)으로 부패한 관리들의 말기적 현상, 그리고 제삼국을 통한 병자호란의 실상, 어려운 때에 처한 조·명 두 나라의 태도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당시 명나라에서는 후금(後金), 이른바 노적(奴賊)이 밖에서 침입하고 안으로는 유적(流賊)이 횡행한 데다 몇 년간 계속되는 한발로 흉년이 계속되어 관리의 부패가 극심하였다. 따라서, 외국 사행에 대해서도 뇌물을 요구했는데, 특히 예부상서의 행패는 적나라하게 그려졌다.

또, 병졸들은 싸움은 하지 않고 민폐만을 끼쳐 백성들은 관병과 노적에게 이중 고초를 겪어야 하였다. 명나라는 조선에서 노적이 압록강으로부터 서울까지 아무 저항도 없이 공격한 점을 내세워 조·청간의 내통을 심히 의심하고 조선의 문제에 대해서는 거의 주목하지 않았다.

그래서 사행이 명나라의 관원을 만나는 예의도 한층 어려워져 지방의 하찮은 무관에게까지 ‘배신(陪臣 : 제후의 大夫가 天子에게 자신을 낮추어 이르는 말)’이라는 말을 써야 하였다. 이 밖에 방물(方物)에 관한 기록이 보이는데 조운(漕運)의 편리함과 육상 운송방법으로 수레 사용의 편리한 점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

이것은 저자가 뒷날 수차(水車)의 제도, 용차(用車)의 편리함을 주장하고 그 실시를 요구한 것으로 나타난다. 이 여행기는 우리 나라의 사절로 명나라에 간 최종여행기로서 명의 멸망 직전 상황을 파악하는데 귀중한 자료이다. 저자의 문집 ≪잠곡집 潛谷集≫ 가운데 수록되어 있다.

1960년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에서 ≪연행록선집 燕行錄選集≫ 상에 수록, 영인 하였다. 마지막에는 신익성(申翊聖)의 발문이 있는데, 주된 내용은 명나라에 대한 은혜와 멸망에 대한 탄식과 한탄이다.

참고문헌

『연행록전집』 16(임기중 편, 동국대학교 출판부, 2001)
『국역연행록선집』 Ⅱ(민족문화추진회, 1976)
『한국사』-근세후기편-(진단학회, 을유문화사, 1965)
「병자호란 전후의 조선,명,청 관계와 김육의 조경일록」(이영춘, 『조선시대사학보』 38.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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