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5광복 후 서울에서 가장 먼저 나온 일간신문으로, 9월 8일 조선총독부 기관지였던 ≪경성일보 京城日報≫에서 나온 좌파기자들이 타블로이드판 국문신문으로 창간하였다.
사장 겸 발행인은 김정도(金正道), 부사장은 고재두(高在斗)였으며, 편집실은 종로 중앙기독교청년회관에 두었고, 조선교학도서회사(朝鮮敎學圖書會社)에서 인쇄하였다.
이 신문은 1945년 11월 11일부터 북한 지지의 좌파 거물 언론인이던 홍증식(洪璔植)이 발행인을 맡았고, 1946년 5월 12일부터는 편집인·발행인 겸 주간이 고재두로 바뀌었으며, 그해 7월 1일자부터 주필에 임화(林和), 정리위원에 한상운(韓相運) 등이 참여하였다.
이 신문은 편집이 비교적 세련되었고, 이념적으로 이른바 진보적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좌익적 성향을 띠었으며 조선인민공화국의 기관지임을 자처하고 나섰다.
1∼51호까지는 사설 없이 발간되었으나 52호(1945년 11월 11일자)부터 ‘사이비의 횡행(橫行)’이라는 제목으로 사설을 게재한 이후 사설과 기고문을 계속 실었다.
창간호에는 <Welcome Allied Forces>라는 제목 아래 대형사진을 싣고 <연합군을 환영함>이라는 박세영(朴世永)의 시를 싣기도 하였으나, 1945년 12월 12일 하지(Hodge,J.R.) 중장의 조선인민공화국 부인성명이 발표되자 14일자 사설에서 <하지중장 성명과 민중의 의혹>이라는 제목으로 미군정을 비난하기 시작하였다.
1945년 12월 29일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한국에 대한 5개년 신탁통치안이 결정되었을 때는 하룻동안 보도를 연기하였다가 이튿날 보도하였으나, 좌익의 입장이 찬탁으로 돌변하자 이 신문도 찬탁을 지지하고 나섰다.
이 때문에 그해 12월 29일 우익청년들이 직공을 납치하고 수류탄을 던지기도 하였는데, 이것이 광복 이후 첫번째의 신문사 테러였으며 이후에도 몇 차례의 테러를 당하였다.
1946년 7월 7일에는 주필 임화와 인쇄인 김경록(金景錄)이 구속되기도 하였으며, 그 해 8월 8일에는 서울시민들의 식량배급 청원데모의 선동적인 기사를 다루어 사장 홍증식과 편집국장 김오성(金午星)이 구속되어 체형과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이 신문이 좌익세력의 대변지 구실을 하면서 계속 미군정 당국을 공격하자 군정 당국은 1946년 9월 6일 신문사를 수색, 유중렬(柳重烈)·이장영(李章榮)·정우식(鄭祐植) 등 사원 다수를 검거하여 구속하는 한편, 이 신문에 대하여 무기한 발행정지처분을 내렸다.
이 신문은 그 뒤 속간되지 못하고 사실상 폐간되었다가 1950년 6월 북한 공산당이 서울을 점령한 이후 공산당 선전지로 발행되다가 공산군이 후퇴하면서 자연 소멸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