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명 ‘김가기전마애각문(金可記傳磨崖刻文)’이라고 하며, 중국에서는 흥륭비(興隆碑)라고 호칭하고 있다. 1987년이지근(李之勤)에 의하여 처음 발견, 소개되었다. 김가기에 관한 문헌기록은『속선전(續仙傳)』과『태평광기(太平廣記)』에 나오지만 정확한 내용은 알 수 없다. 김가기는 신라 하대(下代)에 당나라에 유학하여, 빈공과(賓貢科)에 급제하였고, 장안현위(長安縣尉)를 지냈으며 신라에 잠시 귀국했다가 다시 중국으로 돌아가 생을 마쳤다고 한다.
김가기는 최승우(崔承祐), 승려인 자혜(慈惠)와 더불어 종남산 광법사(廣法寺)에 노닐면서 신원지(申元之), 종리장군(鍾離將軍)과 교유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들의 생존 시기가 많게는 몇 백년에서 몇 십년의 차이가 있어서 김가기와 교우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는 본래 성품이 고요하여 사치를 멀리하였으며 도(道)를 탐구하기 좋아하여 이에 대한 학문을 널리 배우고 익혔다. 또, 신선(神仙)의 경지에 이르는 술법(術法)의 일종인 복기법(服氣法)을 수련하는 등 도교(道敎)의 수행에도 힘썼다.
그를 도사(道士) 중에서도 학식이 풍부하고 수양의 경지가 높은 사람을 일컫는 진인(眞人)이라고 불러 중국 도교사에서 김가기의 위치가 상당한 경지에 있음을 알 수 있다.
『해동전도록(海東傳道錄)』에 의거하여 김가기의 입당(入唐) 시기를 당대 문종(文宗) 개성(開成) 원년(836)으로 보고,『속선전(續仙傳)』등의 기록에 따라 승천 일자를 858년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김가기의 문장 역시 높이 평가되지만, 그의 시문(詩文)은 완전하게 전하는 것은 없고, 제유선사(題遊仙寺) 시의 두 구가 일본 고시선집(古詩選集)인『천재가구(千載佳句)』에 전하는 것을『전당시일(全唐詩逸)』에 전재(轉載)되었다.
마침내 벼슬까지 그만두고 종남산의 자오곡(子午谷)에 은거하여 손수 기화방초(奇花芳草)를 가꾸고 항상 향을 피우고 정좌하여 명상에 잠겼으며, 주로 노자(老子)의 『도덕경(道德經)』과 기타 선서(仙書)를 심독했는데 3년 동안 쉬지 않고 공부한 뒤 신라로 귀국하였다.
얼마 뒤 다시 종남산으로 들어가서 계속 도교를 수련하였는데, 마침내 859년(헌안왕 3) 2월 25일 신선들이 환영하는 가운데 그는 수레를 타고 하늘로 올라간 것으로 되어 있다. 그 이후로는 김가기가 승천한 날에는 모든 도교인들이 그의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김가기 석각은 김가기가 은둔하여 신선으로서 살다가 승천한 곳을 기리기 위해 낭떠러지 바위에 각문을 새긴 것이다. 중국 사람들은 청나라 때에 새겨진 것이라고 하나 이는 잘못이고, 아마 중국 당나라 말∼오대(五代)에 쓰여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석각은 서안(西安)의 남쪽지역에 있는 자오고도(子午古道)의 길옆 개울가에 방치되어 있다. 옆에는 김가기의 승천처(昇天處)와 기거한 곳으로 추측되는 즙거(葺居)터가 있다. 마애각문(磨崖刻文)이 새겨진 바위는 본래 왼쪽 절벽에서 떨어져 나온 것이다. 바위는 화강암으로 석질이 단단하며 무게는 100t이며, 높이 7m, 너비 3.8m의 사다리꼴이다.
바위에 새겨진 각자는 높이 4m, 너비 3.2m이고, 글자는 해서체(楷書體)로 단아한 느낌을 주며 전체 15행으로 200자 정도이다. 김가기에 관한 부분의 윗쪽은 이끼와 습기로 인하여 풍화를 가속시켰기 때문인지 자적(字迹)을 알아볼 수 없게 망가져 있고 희미한 곳도 있으나 전체적으로 보면 양호한 편이다.
석각의 후반부가 바로 김가기에 관한 기록인데, 이 가운데 김가기에 관한 것이 11행이다. 1행은 20자씩인데, 다만 첫줄은 21자이다. 자행(字行)의 길이는 고르지 않다. 글자의 크기는 약 9∼12㎝의 대자이다. 현재 판독이 불가능한 글자가 절반이 넘는다. 글씨는 윗면을 제외하고는 대체로 알아볼 수 있다.
석각은 본문·제발·흥륭비란 제단 등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이 가운데 김가기전이 가장 중심자리에 있고 그 오른쪽 여백과 위쪽의 여백까지를 메우고 있는 것이 두보(杜甫)의 시이다. 이러한 형식으로 볼 때 김가기전이 맨 앞줄의 소자(小字) 5행과 중간 하단에 흥륭비라고 쓴 글자는 1853년(咸豊 3) 애산강영(愛珊姜榮)이 새겨 넣은 것이다.
두보의 ‘현단가증원일인(玄壇歌贈元逸人)’이라는 칠언율시(七言律詩) 다음에 5째줄부터 김가기전으로 이어져 있다. 각문의 내용은『사고전서(四庫全書)』에 수록된『속선전』에 담겨져 있는 것과 별 차이가 없으나 문장이 간결하고 속자(俗字)가 더러 보이는 것이 특색이다.
이 자료는 당나라에 건너간 신라 유학지식인들의 중국에서의 실제적 활동과 중국인들에 미친 영향을 엿보게 하는 귀중한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