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권 20책. 필사본. 서문과 발문이 없어 편집 경위 및 필사 연도를 알 수 없다.
권1에 시 40수, 연구(聯句) 1편, 악장(樂章) 21편, 치사(致詞) 4편, 전문(箋文) 2편, 서(序) 4편, 권2에 비(碑) 24편, 행록 5편, 권3∼14에 제문 764편, 권15에 윤음(綸音) 21편, 권16∼21에 교(敎) 385편, 권22∼25에 조(詔) 269편, 권26∼29에 돈유(敦諭) 148편, 권30에 유서(諭書) 3편, 권31∼39에 비(批) 454편, 권40에 찬(贊) 1편, 명(銘) 1편, 상량문 2편, 잡저 1편 등이 수록되어 있다.
시는 주로 옥류천(玉流川)·옥련정(玉蓮亭) 등 자연경관이나 서설(瑞雪)·상춘(賞春)·춘사(春詞) 등의 계절변화, 그리고 세자나 신하들의 경사 때 지은 것이다. 악장·치사·전문 등은 모두 진연(進宴)이나 진찬(進饌)을 거행할 때 지은 것이다.
서는 국가에서 주관한 관찬서(官撰書)나 개인의 문집을 편찬할 때 써준 것들이다. <증보문헌비고서 增補文獻備考序>는 1906년에 지은 것이다. ≪증보문헌비고≫의 원본은 영조 때 김치인(金致仁) 등이 편찬했던 것인데, 정조 때 이만운(李萬運) 등이 추보(追補)한 것을 다시 원본에 의거해 추가 보충, 재편집해 간행한다는 내용이다.
행록은 주로 왕후들의 일대기를 기록한 것이다. 일반 개인 문집의 행장과 같은 것이다. 그 중에는 왕후 민비(閔妃)에 대한 <명성황후행록 明成皇后行錄>이 실려 있어, 민비에 대한 고종의 심정은 물론 수난의 우리 나라 근대사를 살펴보는 데 도움을 준다.
<명성황후행록>은 민비가 피살된 지 3년 뒤인 1897년 쓰여진 것이다. 먼저 민비의 본가인 여흥민씨(驪興閔氏)의 가계(家系)가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고, 어린 시절·왕비책립·을미사변 등 민비의 일대기가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또한 우리 나라 근대화 과정에서 일어났던 임오군란·갑신정변·동학란·갑오개혁·칭제건원(稱帝建元) 등 다난했던 근대사를 국왕의 입장에서 서술하고 있다. 특히, 갑신정변의 주역 김옥균(金玉均)·박영효(朴泳孝)·홍영식(洪英植) 등을 갑오적신(甲午賊臣)이라 하고, 이들의 음모를 미리 처리하지 못한 것을 한탄한 내용이 주목된다.
이와 함께 을미사변 때에는 김홍집(金弘集)·유길준(兪吉濬)·조희연(趙羲淵)·정병하(鄭秉夏) 등을 사적(四賊)이라고 규정하고, 이들로 인해 외병(外兵)이 국내에 들어와 천하만고에 없는 대변인 을미사변을 일으켰다고 하고, 궐내에 있으면서도 황후를 보호하지 못했음을 자책하고 있다.
제문은 종묘·왕후·신하들에 대한 것으로, 비교적 짧은 문장이나 764편이나 되는 방대한 분량이다. 교는 국왕이 발하는 명령서·훈유서(訓諭書)·선포문을 말하는데, 황제가 발하는 경우는 조서라 한다. 따라서 1897년 연호를 광무라 고치고 고종이 광무황제로 바뀐 뒤의 교는 조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이 책에서 교와 조를 따로 분류했으나 그 성격은 같은 것이다. 윤음은 국왕이 대소 신료나 백성들에게 내리는 훈유문이다. 이 책의 윤음 내용을 보면 척사(斥邪)·포충(褒忠)·양로(養老) 등 다양한 내용이 실려 있고, 그 대상도 관료로부터 민서(民庶)에 이르는 일반 백성, 또는 일정한 지역의 관찰사·수령 등 필요에 따라 수시로 발한 것들이다.
윤음에는 천주교의 전래와 서양 세력의 침투에 따른 척사윤음, 그리고 임오군란·갑신정변 등 정치적 사건에 관련된 것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
1881년에 내린 <유팔도사도대소신민척사윤음 諭八道四都大小臣民斥邪綸音>은 열성조(列聖朝)의 유지를 받들어 혹세무민(惑世誣民)하는 사교(邪敎 : 天主敎)를 배척하고 정학(正學)인 공맹지학(孔孟之學)과 정주학(程朱學)에 힘써 풍속을 바르게 할 것을 당부하는 내용이다.
임오군란과 관계된 <유대소군민윤음 諭大小軍民綸音>은 임오군란의 주동자 및 그들을 추종하는 군사들에게 특별 사면을 명령하는 내용의 윤음이다. 난을 확대시키지 않고 외세를 개입시키지 않은 상태에서 사태를 수습하려는 통치자로서의 면모가 잘 나타나 있다.
돈유는 왕이 관료나 지방의 유현(儒賢)들에게 그 정려(精勵)를 권장하는 내용이다. 유서는 왕이 지방에 부임하는 관찰사·절도사·방어사·유수 등 군사권을 가진 관원들이 왕명 없이 자의로 군사를 발동시키거나, 간의(奸意)에 의한 동병(動兵)을 막기 위해 내리던 일종의 밀부(密符)이다.
이러한 글들은 모두 일반 개인 문집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들로서, 당시의 통치제도나 중앙·지방의 사정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비는 대소신민들의 상소에 대한 하답을 말하는 것으로, 그 내용이 다양하다.
이 책에 실린 비 중에서 가장 많은 것이 관료들의 사직소에 대한 불윤비답(不允批答)이다. 다른 국왕의 문집과 마찬가지로 대부분의 글이 고종 자신이 직접 작성한 것이 아니라 신료들이 작성한 것이지만, 사료적 가치면에서 볼 때 매우 중요하다.
≪고종실록≫이 일본인들에 의해 편찬되어 그들의 의도대로 내용을 윤색하거나 탈락시킨 부분이 많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 문집은 한말의 정치·사회상을 살필 수 있는 새로운 사료가 된다. 장서각도서에 유일본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