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중앙일보사에서 창간하였다. 초기에는 B5판 150면, 말기에는 A5판 300여 면이었는데, 편집 겸 발행인은 김동성(金東成)이었다.
신문사에서 각종 잡지를 발간하기 시작한 것은 1931년 1월 동아일보사가 ≪신동아≫를 창간한 것을 시발점으로 한다. 이러한 현상은 그대로 중앙일보사 및 조선일보사에도 파급되어 마침내 신문사 경영의 잡지시대를 가져왔다.
또한 영세자본력과 소수의 기자로 구성된 재래의 잡지사를 압도 내지 위축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신문사라는 커다란 기구와 조직 및 인원을 가지고 있다는 장점은 확실히 각종 잡지를 대량으로 만들어 내는 데 유리하였다.
≪중앙≫은 여운형(呂運亨)이 조선중앙일보사에 사장으로 취임하여 지면쇄신과 더불어 새로운 문화사업을 펼치면서 나타난 산물이기도 하였다.
≪중앙≫ 창간호의 집필진을 보면, 사장 여운형의 창간사를 비롯하여 주필 이관구(李寬求)의 ‘모순당착의 미곡정책’, 정치부장 배성룡(裵成龍)의 ‘국제정국의 동향’, 학예부장 이태준(李泰俊)의 소설 ‘달밤’ 등이 돋보였다.
또한, 보성전문학교를 비롯한 연희전문학교·이화여자전문학교·경성치과전문학교 등의 각 교수들을 동원하여 문제제기와 그 해결책을 제시하였고, 수필가와 시인의 작품을 소개하고 있어 광범위한 독자층을 대상으로 편집한 흔적을 엿볼 수가 있다.
≪중앙≫은 이처럼 순조로운 출발과 더불어 호를 거듭함에 따라 발전을 보았다. 이에 자극받은 듯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사에서는 1934년 11월 ≪월간매신 月刊每申≫을, 이어서 1935년 11월에는 조선일보사에서도 ≪조광 朝光≫을 각각 창간하였다.
이들 각사는 ≪매일신보≫만 빼놓고 모두 여러 가지 월간잡지를 발행하기에 이르렀다. 중앙일보사의 경우 ≪소년중앙 少年中央≫을 자매지로 발간한 것이 그 좋은 예가 된다. ≪중앙≫의 편집방침은 망라적이고 좌익적 색채가 눈에 띄지 않는 것이 그 특색이라 할 수 있지만, 무게 있는 글들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일장기말소사건(日章旗抹消事件)으로 ≪중앙일보≫가 발행을 정지하자 이 잡지도 1936년 9월 1일 통권 35호를 종간호로 자연히 폐간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