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무대(中央舞臺)는 우리나라에서 중간극(中間劇: 신극과 흥행극의 중간극)을 표방하고 나선 최초의 단체로, 연극의 상업성과 예술성을 동시에 수용하여 절충적인 목표를 지향한 극단이었다. 즉, 1930년대 초반을 대표한 극예술연구회(劇藝術硏究會)의 예술지향적인 순수한 연구성과 1930년대 후반 동양극장(東洋劇場) 계열의 청춘좌(靑春座)와 호화선(豪華船)·연협(演協: 연극협회) 같은 극단의 상업적 방식을 함께 받아들여 전문적이고 연구적이며 직업적인 연극을 지향하였다.
극단 중앙무대는 1937년에 동양극장 전속극단 청춘좌를 탈퇴한 송영(宋影)·서월영(徐月影)·심영(沈影)·박제행(朴齊行)·남궁 선(南宮 仙) 등과 극예술연구회 출신 맹만식(孟晩植)·송재로(宋在魯)·복혜숙(卜惠淑) 등이 종로 2가에 있던 천일영화사(天一映畵社)에서 창립총회를 가졌다. 당시 구성원은 경제부에 김종완(金鍾玩)·홍찬(洪燦), 문예부에 송영·박영호(朴英鎬), 미술부에 김일영(金一英), 연기부에 박제행·서월영·송재로·심영·맹만식·이원근(李元根)·복혜숙·이헌(李軒)·한은진(韓銀珍)·김해수(金海壽)·윤일순(尹一淳)·정원숙(鄭元淑)·정희자(鄭喜子)·이삼순(李三順) 등이었다.
중앙무대는 1937년 6월 23일부터 3일간 박영호 작 「까치 우는 섬」과 송영 작 「바보 장두월(張斗越)」으로 부민관(府民館)에서 창립공연을 가졌다. 제2회 공연부터는 외국 번역물을 곁들여 창작극과 번역극에 구애받지 않았다. 이 때 공연한 작품들이 연학년(延鶴年) 번역 「하이델베르히」, 이기영(李箕永) 원작·송영 각색 「고향」, 나도향(羅稻香) 원작·박영호 각색 「환희(幻戱)」, 채만식(蔡萬植) 작 「예수나 안 믿었으면」등이다. 제3회 공연으로 박영호 작 「앵무의 집」, 안톤 체홉(Anton Chekhov) 작 「결혼신청」등을 공연하는 등 이 극단은 계속 부민관 무대에서 활동하였다.
이 외에도 이 극단은 루이지 피란델로(Luigi Pirandello) 작 「피나무열매 익을 때」, 이광래(李光來) 작 「촌선생(村先生)」, 모리스 메테르링크(Maurice Maeterlinck) 작 「청조(靑鳥: 파랑새)」, 프로스페르 메리메(Prosper Merimee) 작 「칼멘(Carmen)」, 헨릭 입센(Henrik Ibsen) 작 「헬게랜드의 해적」, 알렉산드르 듀마(Alexandre Dumas) 작 「춘희(椿姬)」, 톨스토이 작 「부활」 등을 공연하였다. 이 중 톨스토이 작 「부활」에 대해 남궁 운(南宮 雲)은 동아일보에 공연이 관객에게 특별한 감동이나 재미를 주지 못하고, 배우들의 연기가 현실감이 떨어진다하여 “관객과 하모니가 없다”는 비판적인 평을 내렸다.
중앙무대는 1937년 8월 30일까지 8회 공연을 마친 뒤 경영 책임자 김종완과의 관계를 청산하였다. 이후 연학년이 책임자가 되어 혁신중앙무대(革新中央舞臺)로 활동했으나, 1939년 재정난에 부딪쳐 2년만에 해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