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치상으로 영흥만(永興灣)의 서곡천(瑞谷川) 하류와 갈마반도(葛麻半島)를 포함한다. 이곳은 신라 때산산현(蒜山縣)이었는데 고려 때 이곳에 진명현을 설치하여 동계(東界)에 예속시켰다.
조선시대에 덕원도호부(德源都護府)에 병합시켜 진명사(鎭溟社 : 社는 面에 해당됨)가 되었으며,1910년에 원산부(元山府)로 바뀌었다. 진명의 옛 이름인 산산이나 원산 등은 모두 이곳에 있는 작은 산을 뜻하는 데서 나왔다.
이 곳은 고려시대에 국경지역에 속하여 현성(縣城)이 있었는데, 높이가 9척, 주위가 2, 287척이었고 성안에는 2개의 샘이 있었다고 한다. 동쪽에는 진명포(鎭溟浦)가 있었는데 고려 말기에 이곳의 성창(城倉)이 분탕당하였으므로 병선을 배치하고 진을 둔 결과, 그 뒤로는 왜구의 침입이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안변(安邊)남대천(南大川)을 위시한 여러 하천이 운반한 토사가 퇴적됨으로써 포구가 얕아져서 정박이 어려워 진을 동쪽의 안변 낭성포(浪城浦)로 옮겼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