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래 신라의 칠파화현(漆巴火縣)이었는데, 757년(경덕왕 16)진보현으로 바꾸어 상주(尙州) 소관의 문소군(聞韶郡 : 지금의 義城) 영현으로 하였다. 고려태조는 진안현(眞安縣)을 병합하여 보성부(甫城府 또는 載巖城)로 승격시켰으며, 1018년(현종 9)에 예주(禮州 : 지금의 寧海)의 임내로 하였다.
조선 태조 때 감무를 두었고, 세종 때청부(靑鳧 : 지금의 청송)와 병합하여 청보군(靑寶郡)으로 하였다. 뒤에 이를 나누어 진보현으로 하고 현감을 두었다.
1474년(성종 5) 이 고을 사람 금맹함(琴孟諴)이 현감 신석동(申石同)을 모욕하였다 하여 현을 없애고 청송부에 합쳤다가 4년 뒤에 복구시켰다. 1895년(고종 32)안동부의 진보군이 되었다가, 다음해에 경상북도의 군이 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개편 때 청송군에 병합시켜 진보면이 되었다.
지명 유래는 신라 경덕왕 때 이곳 대동산(大同山)에 봉수를 설치하고 위급함을 알려 참으로 보배스러운 곳이라는 뜻에서 나왔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도 현의 치소 남쪽에 있는 신법산(神法山) 봉수는 동해안의 상황을 안동쪽으로 알렸다.
이곳의 지형은 태백산맥 서사면의 산간분지로서, 낙동강의 지류인 호명천(虎鳴川)이 만든 하곡평야가 당시의 생활근거지였다. 교통의 요지로 안동∼평해를 잇는 동서교통로와 청송∼영양을 잇는 남북의 도로가 이곳에서 교차하였다.
이곳에는 천숙(泉宿)ㆍ춘감(春甘)ㆍ파질(巴叱)ㆍ성부(省夫) 등의 부곡(部曲)이 조선 말기까지 있었던 것으로 전하여진다. 내륙분지에 위치하여 역사적으로 병란을 별로 겪지 않았던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