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에서는 중고기(中古期) 이래 지방사회의 유력자를 촌주(村主)로 임명하여 지배의 매개역할을 수행하게 했다. 촌주는 지방관을 보좌하여 지방사회에서 이루어지는 수취와 역역동원, 군역징발 등에서 일정한 역할을 하였다.
촌주는 진촌주(眞村主)와 차촌주(次村主)로 나눠진다. 지방의 현(縣)은 여러 개의 행정촌(行政村)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리고 각 행정촌은 몇 개의 자연촌(自然村)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자연촌은 지방통치의 기본단위였다. 진촌주는 행정촌의 업무를 담당하였고, 차촌주는 진촌주 아래의 이직자(吏職者)로 자연촌의 업무를 담당했다.
구체적으로 진촌주가 어떠한 신분의 사람이었다는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하지만, 그들이 지방에서 촌주직을 세습하고 촌주위답(村主位沓) 등의 경제적 대우를 받으며 평인(平人: 백성)과는 구별되는 신분적인 계층을 이루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三國史記)』권33 색복·거기·기용·옥사지(色服·車騎·器用·屋舍志)에 “진촌주는 5품(五品)과 같고 차촌주는 4품(四品)과 같다”고 하였다. 그러나 진촌주·차촌주가 그대로 오두품·사두품이었다는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과 관계된 색복 등에서 진촌주는 오두품, 차촌주는 사두품의 대우를 받았다는 것이다. 이로 미루어 진촌주·차촌주는 그 자체가 골품제(骨品制)와는 다른 지방신분의 등급이었다.
「남산신성비(南山新城碑)」제1비와 제2비에 나오는 촌주의 관등은 경위(京位)가 아닌 외위(外位) 뿐이다. 경위는 신라 6부(部)인에게, 외위는 타국인·타부락인에게 주었던 위계였다. 외위도 경위와 마찬가지로 개인적 신분인데, 외위를 받았던 자들은 원래 골품제와는 다른 신분체계에 속하였다. 신라 지배층이 외위를 만든 것은 기존의 복속민들을 자국민으로 대우하려는 의도였다. 그러면서도 자신들과는 기본적인 차별을 유지하려 했기 때문에 별도의 외위를 정비했다.
촌주에게 주어진 관등은 외위로는 「창녕순수비(昌寧巡狩碑)」의 촌주가 술간(述干)으로 가장 높고, 「남산신성비」제1비의 두 번째 촌주가 상간(上干)으로 가장 낮다. 경위로는 후대의 기록으로 「규흥사종명(竅興寺鐘銘)」의 삼중사간(三重沙干)이 가장 높고, 대나마(大奈麻)가 가장 낮다. 여기서 진촌주가 올라갈 수 있었던 최고의 관등은 시대에 관계없이 경위로 8등인 사찬(沙湌, 외위로는 述干)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신라에서는 일정한 관직에 오르는데 필요로 하던 관등이 신분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촌주는 오두품에 해당하는 신분까지만 오를 수 있었다. 실제 육두품에 해당하는 사찬까지 올라갔지만 오두품 대우를 받았다. 이것은 촌주를 포함한 지방민에 대한 신분적 차별로 보인다.
그런데 중앙의 두품제(頭品制)에서 중아찬(重阿湌)이 육두품에게 주어지고, 중대나마(重大奈麻)가 오두품에게 주어진 것처럼 지방민들에게도 신분적 제약에 따른 특진의 길이 있었다. 진촌주는 삼중사찬(三重沙湌)에 오른 예가 있다. 중사찬제도(重沙湌制度)의 설정은 지방민 중에서도 오두품에 해당하는 진촌주에 대한 특진의 방법이었다. 즉 사찬까지 오른 진촌주의 경우 더 올라야할 필요가 생기면 7등급인 일길찬(一吉湌)이 아니라 중사찬, 삼중사찬의 관등을 주었던 것이다. 중나마(重奈麻)도 같은 이유로 설정되었을 것이다. 즉, 나마는 사두품에 해당하던 차촌주가 오를 수 있었던 최고 관등이었다. 나마는 칠중나마(七重奈麻)까지 있었다.
그 외에 상사찬(上沙湌)의 존재가 보이는데, 그것이 관등이었는지는 단정하기 어렵다.
「남산신성비」제1비의 촌주는 경위로 11등에 해당하는 찬간(撰干)과 12등에 해당하는 상간(上干)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제2비에는 경위로 10등에 해당하는 귀간(貴干)과 11등에 해당하는 찬간(撰干)이 나오고 있다. 이 가운데 귀간의 관등을 가진 촌주는 분명히 진촌주에 해당하는 것을 알 수 있으며, 나머지 3인은 차촌주였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이들 촌주 모두가 진촌주였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