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경남도 함흥 출생. 원산에 있는 기독교 계통의 신명학교를 졸업하고 곧 일본으로 건너가 중앙음악학교에서 정식수업을 받았다. 일본에서 사용한 그의 첫 예명은 하세가와 이치로(長谷川一郞)였다. 1930년 3월 콜럼비아레코드사에서「봄노래 부르자」를 출반하여 직업가수 제1호가 되었다.
1932년 일본 유행가의 분수령을 이루게 한 고가 마사오(古賀政男) 작곡「술은 눈물일까 한숨이랄까」를 우리말로 취입, 최고 인기가수가 되었다. 그 뒤 콜럼비아·포리도르·태평레코드사를 통하여 수많은 히트곡을 내놓았다.
1943년 이후 연예 활동을 잠시 중단했다가 8·15광복 후 다시 연예계로 돌아와 왕년의 히트송을 열창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47년 흥행사로 변신, 연예단체를 운영하다가 사업 부진으로 종적을 감추었다.
1·4후퇴 당시 월남한 연예인들이 전하는 바로는 그가 월북하여 아오지탄광에서 중노동을 하였다는 소식만 전할 뿐 생사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이후 북한에서 간행된 자료에서는 1949년에 병사했다고 전하고 있기도 하다. 히트곡으로는「명사십리」·「시들은 청춘」·「물새야 왜 우느냐」등이 있다.